“이익은 없더라도 밑지지만 않는다면 장래를 내다보고 수출을 성사시킨다. 수출이 실현되면 재고품을 수출하지 않고 보다 나은 제품을 새로 생산, 수출해 해외 신용도를 높인다.”
내수가 힘들면 수출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지금의 SK가 그러하다. SK의 모태인 선경직물 때도 그랬다. 하지만 당시 전쟁 직후로 인해 판로확보가 쉽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당시 최종건 회장은 고철이 되다시피 한 직기를 수리하기 위해 폐허가 된 공장터를 뒤져가며 나사못과 부품을 찾았고, 공장 한편에 군용침대를 마련해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장난 직기를 재조립했다.
최종건 회장의 경영수완은 위기 속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1955년에 들어서 국내 직물업계는 극심한 침체국면을 맞았다. 전시 인플레이션에 따른 경기침체로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감소한 결과였다.
그 속에도 선경직물만은 제품이 창고에 쌓일 틈도 없이 팔려나갔다. 선경직물의 인조견 ‘닭표 안감’은 ‘지누시(양복을 만든 후 안감이 변형되지 않게 하기 위한 재단 전 세탁·다림질)’를 하지 않고도 재단이 가능한 유일한 안감이었다.
최종건 회장은 선경직물을 국내 제일의 직물공장으로 키우기를 원했고, 그 실현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최고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종건 회장은 양복 안감 생산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열처리과정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 지누시가 필요 없는 안감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63년 최종건 회장이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금탑산업훈장을 받으며 수출역군으로 변신했다.
◇ 위기 속에 강한 면모 보여
5·16 발발 전후 선경직물과 직물업계는 또다시 위기를 맞이했다. 정부의 외환 부족으로 인한 원사 수입 감축, 시중의 자금경색 등으로 경영난이 심각해졌다. 이 또한 위기 해법의 열쇠는 '1등 제품'이 쥐고 있었다. 최종건 회장은 닭표 안감을 앞세워 불황 탈출의 돌파구를 수출에서 찾았다.
수출은 쉽지 않았다. 무역회사의 반응은 대기업 계열의 직물회사들도 못하는데 선경직물 같은 중소기업이 무슨 수출이냐는 식이었다.
하지만 선경직물은 해외 무역회사를 상대로 수출상담을 직접 추진했다. 홍콩 무역회사 주소록을 확보해 닭표 안감의 견본을 보냈다. 발송한 지 한 달 뒤 홍콩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1962년 4월 8일 한국은 비로소 인견직물 수출국이라는 이름을 올렸다. 선경직물이 이뤄낸 결과다.
당시 선경직물의 한 임원은“가장 기뻤던 일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경이 직물류의 수출을 시도해 첫 선적을 해놓고 회장 이하 전사원이 환성을 올렸을 때”라며 “처음으로 선경이 세계 속의 선경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닭표 안감은 홍콩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선경직물은 곧 홍콩 바이어들과 직거래를 틀 수 있었다. 1962년 한 해 동안 선경직물은 4만6000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이후 SK네트웍스(옛 선경직물)는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직물사업과 함께 에너지, SK렌터카, 생활가전 렌탈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로 인해 지난해 매출액 15조2008억원을 달성했다.
오린아 이베스트증권 연구원은 5일 “SK네트웍스는 최근 사업개편을 마무리해 새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는 SK매직과 차량사업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안정적 현금창출원인 유류·정보통신유통사업을 바탕으로 렌탈과 차량사업 중심의 플랫폼 사업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명환 기자 ymh7536@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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