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시중은행에서 판매한 홍콩H지수 기초 주가연계증권(ELS) 상품에서 올해 들어 1000억원이 넘는 원금손실이 확정됐다. 올 상반기에만 5대 은행에서 5조원대 손실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금융당국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책임을 물을지 주목된다.
17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에서 판매된 홍콩 ELS 상품에서 올들어 지난 12일까지 1067억원의 원금손실이 발생했다. 앞서 국민은행이 판매한 ELS에서 지난 8일 44억원 규모의 첫 손실이 확정된 이후 닷새 만에 손실액이 1000억원대로 불어났다. 이 기간 만기가 도래한 원금은 총 2105억원으로 이 중 1038억원만 상환돼 전체 손실률은 50.7%로 집계됐다. 상품별 최고 원금 손실률은 52.1%, 은행별 손실률은 47.8~51.3% 수준으로 나타났다.
ELS는 주가지수나 개별종목 등 기초자산의 가격이 일정한 범위를 유지하면 약정된 수익을 제공하는 파생상품이다. 통상 6개월마다 기초자산 가격을 평가해 일정 가격을 밑돌지 않으면 정해진 수익을 주고 조기 상환된다. 하지만 만기 시 기초자산 가격이 약정한 수준을 밑돌면 원금손실이 발생한다. 녹인(Knock-in·원금 손실 발생 구간)형 상품의 경우 계약 기간 중 기초자산 지수가 ‘녹인 기준선(50%)’ 아래로 떨어져 녹인이 발생한 경우 만기 시점에 지수가 ‘최종 기준선(70%)’을 넘어야 약정된 원금과 약정 이자를 받을 수 있다.
은행권은 홍콩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한 ELS를 사모·공모를 통해 주가연계펀드(ELF)와 주가연계신탁(ELT) 형태로 판매했다. 문제는 홍콩H지수 ELS가 대거 판매된 지난 2021년 이후 홍콩H지수는 반토막 났다는 점이다. 2021년 초 1만2000선을 넘어섰던 홍콩H지수는 같은 해 말 8000대까지 떨어진 뒤 현재 5000 중반(지난 12일 기준 5481.94)에서 횡보 중이다. 홍콩H지수가 큰 폭으로 반등하지 않는다면 대규모 원금손실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지난해부터 관련 상품의 만기가 도래하면서 작년 하반기에만 5대 은행에서 82억원 규모의 손실이 확정됐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금융권의 홍콩H지수 ELS 총판매 잔액은 19조3000억원으로 이중 79.6%인 15조4000억원의 만기가 올해 도래한다. 분기별로는 올해 1분기 3조9000억원, 2분기 6조3000억원으로 올 상반기 만기 도래 규모만 10조2000억원이다. 만약 홍콩H지수가 현재 수준을 유지할 경우 5대 은행에서 판매한 관련 상품의 상반기 원금손실 규모는 5조원대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은행별 상반기 만기 도래 금액은 국민은행 4조7700억원, 농협은행 1조4800억원, 신한은행 1조3770억원, 하나은행 7530억원, 우리은행 260억원 등이다. 정인지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홍콩H지수 관련ELS는 2021년 상반기 발행 물량이 대거 손실을 보면서 만기 상환에 들어가기 때문에 당분간 발행에 부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금감원은 지난 8일부터 홍콩H지수 ELS 주요 판매사 12곳에 대해 현장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최대 판매사인 국민은행과 한국투자증권을 시작으로 불완전판매 여부 등을 파악할 예정이다. 박충현 금감원 부원장보는 “지난해 11~12월 본점에서 이 상품을 어떻게 판매하게 됐고, 리스크 관리는 어떻게 했는지 등을 중점적으로 점검했고 현장검사를 통해 불완전판매 등 위법이나 위규 사항에 대해 세밀하게 살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앞서 금감원 현장 조사 결과 일부 판매사에서 ▲ELS판매한도 관리 미흡 ▲KPI(핵심성과지표)상 고위험·고난도 ELS 상품 판매 드라이브 정책 ▲계약서류 미보관 등 관리체계상 문제점이 발견됐다. 국민은행의 경우 지수 변동성이 30% 이상이면 ELS 상품 판매 목표금액의 50%만 판매한다는 기존 규정을 80%로 무리하게 바꾸면서 영업 우선정책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금감원은 은행권이 2019년 DLF 등 사모펀드 사태 이후 투자자 보호를 전제로 ELS 같은 고난도 금융상품의 신탁판매 허용을 요청했던 점을 고려해 고객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영업 행태로 인한 위법 사항이 확인될 경우 엄중히 조치한다는 계획이다.
검사 결과에 따라 불완전판매가 입증될 경우 내부통제 부실 책임을 물어 판매사 최고경영자(CEO)의 중징계 가능성도 커질 전망이다. 과거 유사 사례로는 2019년 해외 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와 2020년 라임·옵티머스등 사모펀드 환매 중단 사태가 있다. 금융당국은 당시 문제가 된 상품을 판매했던 기간 임기를 보낸 CEO 대부분에 대해 중징계 처분을 내렸다. CEO 제재의 법적 근거로 내부통제기준 마련 의무 위반을 들었다.
금감원은 2020년 1월 해외금리 연계 DLF 사태와 관련해 손태승닫기손태승기사 모아보기 전 우리금융그룹 회장과 함영주닫기함영주기사 모아보기 하나금융그룹 회장에 대해 중징계에 해당하는 문책경고를 의결했다. 이후 같은해 11월 라임펀드 사태와 관련해 박정림닫기박정림기사 모아보기 KB증권 대표이사와 양홍석 대신증권 부회장에 대해 문책 경고 중징계를 결정했고, 2021년 3월엔 옵티머스 정영채닫기정영채기사 모아보기 NH투자증권 대표에 대해 같은 수위의 처분을 내렸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박정림 대표에 3개월 직무 정지, 정영채 대표에 문책 경고, 양홍석 부회장에 경징계(주의적 경고)를 최종 확정했다.
CEO들은 처분에 불복해 금융당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손태승 전 회장의 경우 문책 경고 등 처분 취소 청구 소송을 제기해 2022년 12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았다. 당시 대법원은 “현행 법령상 금융회사의 내부통제기준 '준수' 의무 위반에 대해 제재를 가할 법적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금융회사의 내부통제기준 '마련' 의무 위반과 내부통제기준 '준수' 의무 위반은 구별돼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함영주 회장은 같은해 3월 징계 취소 청구 소송 1심에서 패소했다. 당시 재판부는 은행장이었던 함 회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이 불완전판매를 방지하기 위한 내부통제기준 마련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시했다. 현 금융회사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 '실효성 있는 내부통제기준'을 마련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실효성'을 충족하지 못한 경우에도 내부통제 기준 마련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함 회장의 항소심 결과는 오는 25일 나온다. 박정림 대표와 정영채 대표도 징계에 불복해 각각 처분 집행정지 신청과 처분 취소 청구와 본안 소송을 냈다.
현 지배구조법은 내부통제 기준 마련의 형식적 의무만 부과하고, 실제 운영 방식에 대해서는 규율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실효성 있는 통제기능의 작동을 담보할 수 있는 수단이 부재하고 책임 영역이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지배구조법은 내부통제와 관련해 '금융회사는 법령을 준수하고 경영을 건전하게 하며 주주 및 이해관계자 등을 보호하기 위해 임직원이 직무를 수행할 때 준수해야 할 기준 및 절차(내부통제 기준)를 마련해야 한다'고만 규정하고 있다.
이에 금융당국은 지난해 6월 금융회사가 임원별 내부통제 책무를 사전에 명확히 구분하고, 각 임원이 금융사고 방지 등 내부통제 의무를 적극적으로 이행하도록 하는 내용의 ‘금융회사 내부통제 제도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지난달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지배구조법 개정안에는 해당 방안이 대부분 반영됐다. 특히 대표이사에 내부통제 총괄 책임자로서 전사적 내부통제 체계를 구축하고 각 임원의 통제 활동을 감독하는 총괄 관리의무가 부여된다. 기존의 내부통제기준 마련 의무에 더해 관리의무가 추가되는 것이다. 개정안은 올해 6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아직 개정안이 시행되지 않아 금융당국은 이번 홍콩 ELS 사태도 과거 사례와 마찬가지로 현행 지배구조법에 따라 CEO 등의 책임 소재를 따질 전망이다. 다만 CEO 징계가 결정되더라도 제재 근거를 두고 법리적 다툼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앞서 내부통제기준 준수 의무 위반을 이유로 제재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판례가 나온 만큼 DLF, 사모펀드 사태와 같이 홍콩 ELS 사태도 CEO 징계 시 비슷한 법정 다툼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며 “금융사들은 이번 사태로 지배구조법 개정안 시행에 맞춰 책무구조도 도입 등에 더 신경 쓰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금감원은 오는 3월까지 이번 사태와 관련한 대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 9일 “일부 판매사들이 상당히 부적절하게 KPI를 설정하는 등 여러 가지 운영상 문제점이 드러난 마당에 창구에서 판매할 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보고 있다”며 “손실 분담 내지는 책임 소재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가 돼야 한다”고 밝혔다.
한아란 한국금융신문 기자 aran@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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