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이 오는 7일 30주년을 맞는다.
그간 삼성은 질보다 양을 중시해왔다. 얼마나 많이 생산하고 많이 판매했는가에 집중해왔다. 이렇다 보니 국내에선 ‘제일’이었지만 미국, 일본 등 해외 선진 시장에선 싸구려 취급을 받고 있었다. 미국 현지 매장에서 삼성 제품이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으며 구석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선대회장은 “삼성이란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 한쪽 구석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 왜 삼성 이름을 쓰는가? 진열대에 놓여 있는 제품 중에는 뚜껑이 깨져 있거나 작동이 안 되는 것도 있지 않나? 이는 주주, 종업원, 국민, 나라를 기만하는 행위”라며 격분했다.
내부고발 비디오를 보고 충격을 받은 이 선대회장은 “회사가 썩었다. 완전히 썩었다”라며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라며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고 주문했다.
실제로 이 선대회장은 6월 7일 신경영 선언 이후 24일까지 18일간 프랑크푸르트, 스위스 로잔, 영국 런던에서, 7월 4일부터 8월 4일까지 한 달간 일본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에서 회의와 특강을 주재했다. 이 선대회장이 두 달간 임직원들과 나눈 대화 시간만 350시간에 이른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93년 불량률은 전년 대비 적게는 30%, 많게는 50%까지 줄일 수 있었다.
2년 뒤에는 무선전화기(애니콜) 화형식도 진행했다. 삼성전자 무선전화기 사업부가 무리하게 완제품을 생산하면서 불량률이 11.8%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이후 이 선대회장은 구매 고객에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고, 수거한 제품 15만대를 화형식을 통해 전량 폐기했다. 이때 회수된 제품은 150여억원 어치에 이른다.
재계에선 ‘신경영’ 선언이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시발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화형식을 치렀던 삼성전자의 휴대폰은 2012년 글로벌 1위에 올랐다. 반도체는 1992년 D램 1위에 이어 2002년 낸드플래시까지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이후 2017년부터는 인텔을 제치고 반도체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라섰다. 가전제품도 마찬가지다. 2006년 ‘보르도 LCD TV’를 선보이며 처음으로 TV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 뒤 17년 연속 글로벌 점유율 1위 자리를 유지해오고 있다.
글로벌 '1위' 기업 도약…향후 30년 '뉴삼성' 키울 사업은?
30년 전 국내 1등에 불과했던 삼성은 현재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시총도 1993년 3조1000억원에 불과했지만, 2023년 현재 약 627조원으로 200배 이상 늘었다. 사업 실적도 마찬가지다. 매출도 41조원에서 466조원대로, 영업이익도 4900억원에서 약 55조원대로 대폭 성장했다.
그러나 최근 삼성은 위기에 직면해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 속에서 삼성이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 사업은 미·중 간 갈등이 악화되면서 사업 불확실성마저 커졌고, 메모리 수요 감소에 가격도 하락세를 이어갔다.
이 때문에 올해 1분기 삼성전자는 영업이익 6402억원을 기록하며 14년 만에 적자를 기록했다. 2분기에는 이보다 더 낮은 영업이익을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일각에선 삼성전자가 전체 적자를 기록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재용닫기이재용기사 모아보기 회장은 선대회장의 ‘신경영’을 이을 ‘뉴삼성’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그중에서도 이 회장이 중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반도체, 바이오, 배터리, 로봇이다.
우선 반도체 사업에선 메모리 1위 기업으로서의 초격차를 유지함과 동시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등 시스템반도체 사업 역량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 2019년 “메모리에 이어 파운드리를 포함한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도 확실히 1등을 하겠다”며 ‘시스템반도체 2030’ 비전을 선포한 바 있다.
지난 3월에는 오는 2042년까지 300조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 규모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바이오 사업도 이 회장이 ‘제2의 반도체 신화를 이루자’며 차세대 중점 사업으로 꼽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투자로 제조 기술력을 강화해 발 빠르게 위탁개발생산(CDMO) 글로벌 1위 자리에 올랐다.
이 회장은 지난달 미국 출장에선 ▲호아킨 두아토 J&J 최고경영자(CEO) ▲지오반니 카포리오BMS CEO▲누바 아페얀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 CEO ▲크리스토퍼 비에바허 바이오젠 CEO ▲케빈 알리 오가논 CEO 등 글로벌 빅파마들과 만나 바이오 사업 경쟁력 강화와 신사업 발굴을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후 이 회장은 삼성바이오로직스 북미 판매법인 직원들과 만나 "출발점은 중요하지 않다, 과감하고 끈기 있는 도전이 승패를 가른다"며 "반도체 성공 DNA를 바이오 신화로 이어가자"고 강조했다.
전장 산업도 삼성의 새로운 수익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전기차·자율주행차에는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와 하만의 카오디오 및 인포테인먼트 등을 비롯해 삼성SDI의 배터리, 삼성디스플레이의 차량용 디스플레이, 삼성전기의 카메라 모듈 등이 탑재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장 시장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향후 주요 수익창출원으로 기대해볼 수 있다.
이외에도 AI, 로봇, XR(확장현실) 등 미래산업에서도 ‘초격차’를 이어가기 위해 인재 영입 및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로봇 사업 역량 강화를 위해 올 초 로봇 개발업체 ‘레인보우로보틱스’의 지분 14.99%를 867억원에 인수하며 2대 주주로 올라섰다. 이 과정에서 콜옵션 행사 시 최대 주주로 오를 수 있는 권한도 확보했다. 이에 업계에선 2016년 하만 인수 이후 이뤄지지 않은 대형 M&A(인수합병)가 로봇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냐는 기대감도 나온다.
"책임 경영 필요"…이재용, 등기임원 복귀 가능성?
최근에는 이 회장이 책임경영을 위해 등기임원으로 복귀할 것이란 가능성도 나온다. 메리츠증권은 지난달 보고서를 통해 “올해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7조9000억원으로 지난해 43조4000억원과 비교해 크게 감소할 것”이라며 “실적 악화기에 책임경영 필요성은 오너일가의 등기임원 복귀로 연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일각에선 아직 등기임원의 복귀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아직 이 회장이 삼성물산 부당합병,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관련 자본시장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 사법리스크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둘러 등기임원으로 복귀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한편,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 계열사는 올해 '신경영 선언' 30주년을 기념하는 별도의 행사 없이 조용히 보낼 예정이다.
정은경 기자 ek7869@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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