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연구원은 가입자의 상품 선택에 의존하는 현행 운용체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과 디폴트옵션의 옵트아웃 전환 등을 통해 의사결정 및 책임구조를 재설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4일 서울 여의도 자본시장연구원에서 열린 ‘2026년 제1차 KCMI 이슈브리핑’에서 “퇴직연금은 적립금 규모가 빠르게 커졌지만 운용성과와 연금화 성과는 제도 목적에 미달했다”며 “개편의 초점은 상품 추가가 아니라 의사결정 구조와 책임구조의 전환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처럼 시장 규모가 급격하게 커지는 동안 자산 운용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가운데 75.4%가 원리금보장상품에 집중돼 있다. 원금 안정성을 중시하는 운용 관행만으로는 장기간 운용되는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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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퇴직연금의 최근 10년 평균 수익률은 2.64%에 그쳤다. 유형별로는 DB형이 2.27%로 가장 낮았으며 DC형은 3.09%, IRP는 2.99%였다.
원리금보장상품은 시장 변동성이 커질 때 손실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장기간 운용되는 연금자산의 특성을 고려하면 수익률을 충분히 끌어올리기 어렵다는 게 자본시장연구원의 판단이다.
특히 가입자의 적극적인 운용을 전제로 한 현행 제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이 저수익 운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디폴트옵션이다.
지난해 디폴트옵션 적립금은 53조3000억원까지 증가했지만 이 가운데 안정형 상품 비중이 85.4%에 달했다. 전체 수익률도 3.69% 수준에 머물렀다.
현재 디폴트옵션 역시 가입자의 사전 선택을 전제로 하고 있어, 적극적으로 운용에 나서지 않으면 장기 투자에 적합한 상품으로 자산이 자동 배분되기 어렵다는 게 연구원의 판단이다
자본시장연구원은 이를 ‘옵트아웃’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가입자가 별도로 운용 상품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타깃데이트펀드(TDF)나 타깃리턴펀드(TRF) 등 장기·분산투자 상품에 자동으로 투자되도록 제도를 설계하자는 것이다.
남 연구위원은 “가입자의 무관심으로 저수익 상품이 방치되는 것을 막으려면 실질적인 자동 운용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궁극적으로는 가입자 개인의 선택에만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전문적인 운용 주체가 가입자의 장기 이익을 책임지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게 연구원의 제언이다.
이를 위해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도 필요하다고 봤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독립적인 의사결정기구와 수탁자책임을 바탕으로 가입자의 장기적인 이익을 중심으로 적립금을 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남 연구위원은 영국의 ‘마스터 트러스트’와 호주의 ‘슈퍼애뉴에이션’ 등을 사례로 들며 단순히 기금 규모를 키우는 것보다 독립성·전문성·이해상충 관리·감독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금형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과 상당 기간 병존할 가능성이 큰 만큼 기존 제도의 운용 책임도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DB형은 적립금운용위원회를 실질화하고 외부위탁운용(OCIO)을 확대하는 한편 DC형은 디폴트옵션을 옵트아웃 방식으로 전환하는 등 제도 유형별로 운용체계를 손질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국민연금공단의 퇴직연금시장 참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국민연금공단이 제시하는 높은 운용수익률과 낮은 운영비용이 현행 공공형 퇴직연금인 근로복지공단의 ‘푸른씨앗’과 비교해 뚜렷한 차별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공적연금과 사적연금의 운용을 한 기관에 집중하는 것 역시 다층 연금체계의 위험분산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자본시장연구원의 제언은 결국 500조원으로 커진 퇴직연금을 ‘누가, 어떻게, 어떤 책임으로 운용할 것인가’의 문제로 다시 보자는 것이다.
가입자에게 상품 선택권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금융기관과 운용 주체가 가입자의 장기 이익을 위해 운용 결과에 책임지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미다.
남 연구위원은 “퇴직연금은 후불임금 보전 장치를 넘어 국민연금을 보완하는 의무적 노후소득보장 제도로 재정의돼야 한다”며 “퇴직연금은 적립금 규모가 아니라 운용책임 구조로 평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금융기관은 상품 판매 경쟁에서 벗어나 가입자 최선 이익을 위한 운용책임 경쟁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희일 한국금융신문 기자 heuyil@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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