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채와 은행채는 물론 증권채·카드채, 기업어음(CP)까지 투자 대상을 넓히면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채권을 발행하던 기업에서 이제는 시장의 주요 매수 주체로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평가다.
재무제표가 보여주는 유동성
SK하이닉스(대표이사 곽노정닫기
곽노정기사 모아보기)의 공격적인 채권 투자 배경에는 사상 최대 수준으로 불어난 현금창출력이 있다.성장세는 올해 들어서도 이어졌다. 2026년 1분기 연결기준 매출액은 52조 5763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98.1%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37조 6103억 원으로 405.5% 늘었다. 당기순이익은 40조 3459억 원으로 397.6% 증가했으며, 이익잉여금은 148조 7464억 원까지 불어났다. 지난해 영업활동으로 창출한 현금만 53조 3731억 원에 달한다.
이렇게 쌓인 현금은 재무제표상 자금 운용 계정의 변화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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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흐름표에서도 같은 기간 단기투자자산에 9조 5045억 원이 순투자된 것으로 나타나 잔액 증가를 뒷받침한다. 규모가 더 큰 단기금융상품(1분기 말 18조 2201억 원)은 대부분 공정가치 평가 대상이 아니어서 분석 대상에서 제외했다.
채권시장으로 넓어지는 투자
구체적인 투자 사례도 확인되고 있다.지난 6월 초 NH투자증권과 KB증권의 2년물 공모 회사채 수요예측에서는 SK하이닉스로부터 자금 운용을 위탁받은 증권사 신탁계정이 물량을 배정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투자업계는 배정 규모를 2500억 원 안팎으로 추산하고 있다. 삼성카드와 신한카드, KB국민카드, 현대카드, BC카드 등 AA등급 이상 카드채도 1조 4000억 원가량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기 CP 시장에서도 SK하이닉스의 존재감은 커지고 있다. 이는 투자 전략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SK하이닉스의 채권 투자는 원래 1년 미만의 CP와 여전채 위주였지만, 최근에는 투자 대상 만기가 점차 길어지는 추세로 파악된다.
실제 우리카드는 이달 16일 총 3200억 원 규모의 장기 CP를 발행했는데, 이 가운데 상당 물량을 SK하이닉스가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할인율은 두 만기 모두 연 4.04%로, 발행 하루 전 AA0 등급 카드채 2.5년물 민평금리(연 4.395%)를 밑돌았다. 미래에셋증권 역시 지난 9일 만기 2년 이상의 장기 CP 1조 2600억 원을 발행했으며, 이 물량도 대부분 SK하이닉스가 사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변화는 카드사 조달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장기 CP 발행이 다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카드채 조달금리가 연 4%대로 상승하면서 카드사들은 회사채 외에도 해외 ABS와 ESG채권, 김치본드 등으로 조달처를 다변화하고 있다. 여기에 대규모 투자 수요를 갖춘 SK하이닉스가 장기 CP 시장에 등장하면서 새로운 조달 창구가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앞선 우리카드와 미래에셋증권 사례에서도 보듯 SK하이닉스가 참여한 개별 딜에서는 할인율이 낮아지는 효과가 확인된다.
시장 전체 영향은 아직 제한적
그렇다고 SK하이닉스의 매수세를 채권시장 전반의 수급 개선이나 금리 하락 신호로 확대 해석하기는 이르다.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연초 2.935%에서 지난 20일 3.895%까지 상승했다. AA- 등급 3년 만기 회사채와 국고채 간 신용스프레드도 연초 50bp에서 이달 중순 71bp까지 확대됐다. 7월 들어 초장기물 금리도 큰 폭으로 올라 20일 기준 국고채 20년물과 50년물 금리는 전월 말 대비 각각 24.2bp와 20.3bp 상승했다.
원·달러 환율 상승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기대 후퇴, 초장기물 수급 부담 등 거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SK하이닉스 등 개별 매수 주체의 등장을 시장 전체의 신용스프레드 축소나 금리 하락으로 곧바로 연결 짓기는 이르다는 것이 시장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SK하이닉스의 매수 확대가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사례에 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사례를 일시적 현상으로만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현금 여유가 풍부한 제조업 대기업들이 자금 운용을 다변화하면서 채권시장에서 영향력 있는 투자자로 참여하는 흐름이 이제 막 시작됐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자산운용사의 회사채 매수 여력이 예전만 못한 상황에서 이들 '캐시리치' 기업들이 연기금·공제회에 이어 채권시장의 새로운 수급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두경우 한국금융신문 전문위원 kwd1227@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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