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한국소비자연맹은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미국 디스커버리 제도의 교훈과 실효적 집단소송법 도입 방안’을 주제로 국제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번 토론회는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와 민주당 민병덕 을지로위원회 위원장, 강준현 의원, 김남근 의원, 이강일 의원, 박홍배 의원, 박주민 의원, 박희승 의원, 집단소송법제정연대와 공동으로 마련됐다. 참석자들은 현행 민사소송 제도에서는 소비자가 기업 내부의 계약자료, 의사결정 과정, 알고리즘 운영정보 등 피해 입증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현재 국내에서는 증권 분야에 한해 집단소송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적용 범위와 절차가 제한적인 데다 핵심 증거 확보가 어렵다는 점이 제도의 활성화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거론돼 왔다.
“디스커버리는 양측에 증거 접근 보장하는 절차”
미국 로펌 하우스펠드(Hausfeld LLP)의 카일 베이츠(Kyle Bates) 파트너 변호사는 ‘미국의 집단소송과 디스커버리’를 주제로 미국 제도의 운영 원리와 빅테크 관련 소송에서의 역할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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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커버리는 정식 재판에 앞서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문서와 전자정보 제출을 요구하거나 관계자 진술을 확보하는 절차다. 이를 통해 양측이 사건의 사실관계와 법적 위험을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베이츠 변호사는 증거개시 과정에서 사실관계가 구체화되면 당사자가 소송의 승패 가능성과 예상 손해액을 현실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 판결 이전에 조정이나 합의로 분쟁이 해결되는 효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디스커버리의 핵심 목적이 특정 당사자를 돕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법원이 충분한 자료를 토대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증권집단소송 부진 원인도 핵심 증거 확보의 어려움”
이은우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는 ‘한국 증권집단소송의 실패와 새로운 집단소송법의 과제’를 주제로 발표했다.이 변호사는 국내 증권집단소송제도가 기대만큼 활용되지 못한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피해자가 기업 내부의 핵심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을 꼽았다.
증권 관련 불공정거래나 허위공시 사건은 기업 내부의 의사결정 과정과 담당자 간 소통 내용, 회계자료 등을 확인해야 책임을 규명할 수 있지만 현행 문서제출명령만으로는 필요한 자료를 충분히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변호사는 새로운 집단소송법에 포괄적인 자료제출명령 제도를 마련하고 정당한 사유 없이 자료 제출을 거부하거나 증거를 훼손한 경우 실효성 있는 제재를 부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자료제출 의무와 증거보전, 제출 거부에 따른 불이익 등 핵심적인 증거 관련 규정을 다른 법률에 맡기지 않고 집단소송법에 직접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소비자원 “자료제출 범위와 비례성 함께 고려해야”
이어진 종합토론에서는 강정화 한국소비자연맹 회장이 좌장을 맡아 소비자단체와 법조계, 국회, 정부 관계자들이 한국형 디스커버리의 구체적인 설계 방향을 논의했다.김도년 한국소비자원 박사는 소비자 피해구제와 분쟁조정 절차를 증거조사 제도와 연계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소송이 시작된 뒤에만 자료를 확보하도록 할 것이 아니라 소비자원의 피해구제나 분쟁조정 단계에서도 필요한 자료를 조사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면 소송 이전에 분쟁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자료제출 요구가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주거나 영업비밀이 무분별하게 공개되지 않도록 제출 대상과 범위를 명확히 하고 사건의 규모와 자료의 중요성을 고려하는 비례성 원칙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옵트아웃 방식과 증거개시 함께 도입해야”
김주호 참여연대 민생경제팀장은 미스터피자와 카카오모빌리티 관련 사례를 언급하며 현행 제도에서는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하더라도 실제 보상으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지적했다.김 팀장은 피해자가 소송에 개별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혀야 하는 ‘옵트인’ 방식보다 일정한 요건을 갖춘 피해자가 별도로 제외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판결 효력이 적용되는 ‘옵트아웃’ 방식이 집단적 소비자 피해 구제에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옵트아웃 방식이 도입돼도 피해자가 기업의 위법 행위와 손해 발생을 입증할 자료에 접근하지 못하면 집단소송의 실효성이 떨어질 수 있다며 증거개시제도를 함께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민 한국소비자연맹 소비자공익소송센터 변호사는 소비자단체소송 수행 경험을 바탕으로 현행 문서제출명령의 한계를 지적했다.
현행 제도에서는 신청인이 제출을 요구하는 문서의 명칭과 내용 등을 구체적으로 특정해야 하는데, 기업 내부에 어떤 문서가 존재하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소비자로서는 이 요건을 충족하기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이 변호사는 문서 특정 요건을 완화하고 법원의 자료제출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상대방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거나 과태료·제재금을 부과하는 등 실질적인 불이익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영업비밀 보호·남용 방지 장치도 과제
토론에서는 증거개시제도의 필요성과 함께 기업의 영업비밀과 개인정보 보호, 과도한 자료제출 부담, 소송 남용 가능성을 줄일 장치도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황성필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현행 문서제출명령 제도가 증거 편재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며 국내 법체계와 유사 입법례를 고려한 한국형 증거개시제도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특히 법원이 자료제출 범위와 필요성을 심사하고 영업비밀이 포함된 자료는 열람자를 제한하거나 비공개 심리를 활용하는 등 보호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다.
권순국 공정거래위원회 소비자정책총괄과장은 집단소송제와 증거개시제도가 도입되면 다수 소비자 피해에 대한 구제와 분쟁조정 절차에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권 과장은 소비자 피해구제의 실효성을 높이면서도 기업의 정당한 영업비밀과 방어권을 보호할 수 있도록 우리 법체계에 맞는 균형 있는 제도가 설계될 필요가 있다며 공정거래위원회도 관련 논의에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집단소송법과 증거조사제도 함께 정비해야”
강정화 한국소비자연맹 회장은 “집단소송 절차만 도입하고 피해자가 증거에 접근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소비자 피해구제라는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말했다.이어 “자료제출 범위와 법원의 통제, 영업비밀 보호, 증거훼손 제재 등을 포함한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를 집단소송법과 함께 논의해야 한다”며 “국회와 시민사회단체 등과 입법 논의를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집단소송제도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원인으로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일부 피해자가 대표로 소송을 제기하고 그 판결의 효력을 다른 피해자에게도 적용하는 제도다.
현재 국내에서는 증권 관련 손해배상 사건에 제한적으로 집단소송제가 적용되고 있다. 소비자·개인정보·환경·제품 결함·플랫폼 거래 등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은 여러 차례 논의됐지만 소송 참여 방식과 증거개시 범위, 소송비용, 남소 방지 장치 등을 둘러싼 이견으로 포괄적인 집단소송법 제정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이창선 한국금융신문 기자 lcs2004@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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