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은행권의 수익 다변화나 신사업 진출을 위한 규제 완화는 더디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금융당국이 생산적 금융 확대를 위해 은행권 자금공급 여력을 높이는 자본규제 합리화 방안을 내놓으며 일부 부담 완화에 나섰지만, 투자일임업 허용 범위 확대와 퇴직연금 상장지수펀드(ETF) 실시간 거래 등 은행권 숙원 과제는 여전히 제도 개선 속도가 제한적이다. 책임은 커지는데 영업 자율성과 혁신 기반은 충분히 열리지 않는다는 불만이 커지는 배경이다.
공공성 요구에 비용 부담 확대
은행권이 가장 크게 느끼는 부담은 공적 역할의 동시다발적 확대다. 가계부채 총량 관리와 자본건전성 강화로 영업 여력은 제한되는 반면 금융사기 예방, 취약차주 지원, 상생금융, 포용금융 관련 비용은 계속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포용금융 종합평가체계 도입도 은행권에는 추가 부담으로 인식된다. 취약계층 금융지원과 소상공인 상생, 금융 접근성 확대는 필요하지만 해당 역할이 은행권에 집중될수록 민간 금융회사로서의 자율적 영업 판단은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가계대출 관리도 비슷한 구조다. 은행들은 당국의 가계부채 관리 기조에 맞춰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마이너스통장대출 한도와 심사 기준을 보수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규제가 바뀔 때마다 실수요자의 자금 조달 계획이 흔들리고, 영업 현장에서는 고객 문의와 민원 부담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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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공동분담론 부상
보이스피싱과 금융사기 책임 확대도 은행권의 대표적인 애로사항으로 꼽힌다. 국회 정무위원회에서는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발생 시 금융회사에 무과실책임을 부여하는 내용의 법안이 논의된 바 있다. 개정안은 일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 금융회사가 고의·과실 여부와 관계없이 피해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보상하도록 하는 구조다.은행권은 금융사기 예방과 피해자 보호 취지에는 공감한다. 실제 은행들은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 고도화, 24시간 모니터링, 고령층 보호장치 강화 등에 인력과 비용을 투입하고 있다.
다만 은행이 통제하기 어려운 영역까지 결과 책임을 부담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입장이다.
또한 보이스피싱이 은행 거래 단계에서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통신, 메신저, 플랫폼, 개인정보 유출, 불법 광고, 대포통장 유통 등이 결합한 범죄인 만큼 금융회사만으로는 예방과 회복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국회 정무위 검토보고서에 제출된 은행권 의견에서도 소비자의 경각심, 통신사의 스미싱·스팸·악성앱 차단, 금융회사의 이상 금융거래 탐지, 수사기관의 범죄조직 검거와 피해금 환수 등 여러 주체의 노력이 합쳐져야 예방과 회복이 가능하다는 점이 담겼다. 금융·통신·공공이 보상책임을 공동 분담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다.
은행권 관계자는 "은행이 예방조치를 모두 이행했는데도 결과 책임까지 부담하게 되면 책임과 권한의 불균형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보이스피싱은 통신사, 플랫폼, 수사기관 등 관련 주체가 함께 책임을 분담하는 구조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증시 활황에 빚투 우려도 부담
최근 증시 자금 유입과 투자 수요 확대도 은행권에는 새로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본시장 활성화는 정책적으로 장려되는 흐름이지만, 신용대출이나 마이너스통장 자금이 투자 수요로 이어질 경우 은행권 대출 관리 책임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은행권은 고객의 신용도를 바탕으로 취급된 대출 자금이 실제 어디로 흘러가는지 사전에 모두 통제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특히 신용대출과 마이너스통장은 사용 목적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상품이다. 그럼에도 빚투 우려가 커질 때마다 은행권의 한도 관리와 대출 심사 강화로 대응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는 불만도 나온다.
은행권 내부에서는 자본시장 활성화와 가계부채 억제라는 정책 목표가 동시에 추진되는 상황에서 그사이의 부담이 은행권 대출 관리 책임으로만 귀결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빚투 문제는 투자자 보호, 증권사 신용공여, 자본시장 과열 관리 등과 함께 종합적으로 봐야 할 사안이라는 것이다.
업권 간 형평성 문제도 제기된다. 올해 1분기 증권사들은 증시 호황과 거래대금 증가에 힘입어 분기 기준 사상 최대 수준의 순이익을 거뒀다. 자본시장 활성화의 수혜는 증권업권이 크게 누리는 반면, 포용금융과 상생금융, 가계대출 관리 등 공적 부담은 은행권에 더 집중돼 있다는 인식이 은행권 내부에 적지 않다.
은행권에서는 동일한 금융소비자를 대상으로 수익을 얻는 업권이라면 사회적 책임도 균형 있게 분담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은행만 공공성을 이유로 추가 부담을 지는 구조가 이어질 경우 장기적으로 업권 간 형평성 논란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자본규제 완화에도 신사업 제자리
금융당국도 은행권의 자금공급 여력 확보를 위해 일부 자본규제 합리화에 나섰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지난 4월 제5차 생산적 금융 대전환 회의에서 은행·보험 자본규제 합리화 방안을 논의했다.이에 따라 은행권에서는 운영리스크 손실인식 합리화, 구조적 외환포지션 승인 확대, 내부등급법 변경승인 처리기간 단축 등을 통해 최대 74조5000억원의 추가 자금공급 여력이 확보될 것으로 추산됐다. 보험업권까지 포함하면 최대 98조7000억원 규모의 추가 공급 여력이 생긴다는 설명이다.
다만 은행권에서는 일부 자본규제 개선만으로 누적된 규제 부담을 해소하기 어렵다고 본다. 가계부채 관리와 취약차주 지원, 생산적 금융 확대, 금융사기 대응 등 정책적 역할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자본건전성 기준까지 보수적으로 강화되면 대출 여력, 신사업 투자, 주주환원 등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은행권은 책임 확대와 함께 신사업 규제 개선도 병행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자이익 의존도를 낮추고 비이자이익을 확대하라는 요구가 커지고 있지만, 정작 자산관리와 플랫폼, 퇴직연금 등 주요 분야에서는 제도상 제약이 여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은행권은 지난해 국정기획위원회에 제출한 '경제 선순환과 금융산업 혁신을 위한 은행권 제언'에서 비금융 진출 확대, 해외 비금융 플랫폼 인수 허용, 디지털자산업 진출 허용, 망분리 규제 개선, 신탁 기능 강화, 투자일임업 허용 범위 확대 등을 건의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투자일임업이다.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는 투자일임업 겸영이 전면 허용되고 보험사도 법령상 제약이 없는 반면, 은행은 일임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에 한해 제한적으로 투자일임업이 허용되는 상황이다. 금융상품이 복잡해지고 고객별 자산관리 목표가 다양해지는 만큼 은행도 고객 맞춤형 포트폴리오 구성과 관리 기능을 강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퇴직연금 ETF 실시간 거래도 은행권의 숙원 과제다. 은행과 보험사 퇴직연금 가입자는 ETF 주문 체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증권사 고객은 ETF를 실시간으로 매매할 수 있다. 이에 은행권은 퇴직연금 시장에서 고객의 상품 선택권과 운용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ETF 실시간 거래가 허용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다만 퇴직연금 ETF 실시간 거래 허용은 관계부처 협의와 업권 간 이해관계 조율이 필요한 사안이어서 제도 개선 시점은 아직 불투명하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은 예금 수취기관이라는 특성상 높은 건전성 규제와 소비자보호 의무를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최근에는 그 범위를 넘어 사회적 책임과 정책적 역할까지 상당 부분 집중되는 흐름"이라며 "소비자보호와 건전성 관리 필요성에는 공감하되 과도한 책임 전가를 줄이고, 신사업과 비이자이익 확대를 위한 제도 개선도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다혜 한국금융신문 기자 dahyeji@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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