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차에서 실손보험의 올해 보험료 인상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가입자가 3900만명에 달하는 만큼 '국민보험', '제 2의 건강보험'으로도 불리는 실손보험은 사실 보험료뿐만 아니라 보험금을 청구하는 과정에 관해서도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데요. 이와 관련해,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가 보험 공약으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내세우며 해당 법안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뭐길래?
18일 정치권과 금융권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 선거 후보는 보험 공약으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고지 의무 대상 명확화 ▲보험대리점(GA) 판매책임 강화 ▲일정금액 이하 보험금 분쟁 분조위 편면적 구속력 부여 ▲온라인플랫폼 판매 법적책임 강화 5가지를 발표했습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3900만명에 달하는 실손보험 가입자들이 병원에서 일일이 서류를 떼지 않아도 보험금 청구를 할 수 있게 만드는 방안입니다. 보험 가입자가 필요한 서류를 의료 기관에 요청하면 의료 기관이 해당하는 자료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혹은 다른 기관을 통해 보험사로 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청구 절차가 간소화되면 가입자들이 보험료를 내고도 청구를 포기하는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현재, 실손보험 가입자들은 '번거로운 절차' 등으로 인해 보험금 청구를 주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융소비자연맹, 녹색소비자연대 등을 포함한 소비자단체가 지난해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해 만 20세 이상, 최근 2년간 실손의료보험에 가입하고 있는 일반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실손의료보험 보험금 청구 관련 인식'을 조사한 결과, 최근 2년 이내에 실손의료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었음에도 청구를 포기한 경험이 전체 응답의 47.2%나 되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응답자가 택한 청구 포기 사유에는 ▲진료 당일 보험사에 제출할 서류를 미처 챙기지 못했는데 다시 병원을 방문할 시간이 없어서 ▲증빙서류를 보내는 것이 귀찮아서 ▲진료 금액이 적어서 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청구 과정이 간소화되면 의료기관은 서류 발급에 드는 인력 및 종이서류 절감 등 행정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가입자들은 편리하게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고요, 보험사들은 실손보험 가입자들의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지난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실손보험청구 절차를 간소화라고 권고한 후 14년째 계속해서 법안이 발의되고 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14년째 반복될까?
의료계의 반대 때문입니다. 의료계는 의료기관이 서류 전송 주체가 되는 것의 부당성, 환자 개인정보 유출 위험성 등을 이유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먼저, 서류 전송 주체와 관련한 의료계의 반대 의견은 실손보험금을 지급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는 건 보험회사가 할 일인데, 실손보험과 관계없는 의료기관이 주체가 돼 추가적인 업무를 부담하는 게 부당하다는 설명입니다.
의료계 관계자는 "실손보험금 지급을 위한 보험자료 수집은 보험회사 의무사항이지만 법안이 도입되면 의료기관에서 서류 전송 주체가 되는데 실손보험과 관계없는 의료기관이 계약자를 위해 추가로 불편한 업무를 부담하게 돼 부당하다"며 "계약자의 불편을 개선하는 것은 보험사의 역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의료계는 환자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도 표합니다. 가뜩이나 다른 자료와 연계되기 쉬운 해당 자료를 의료기관이 전송하는 과정에서 환자 개인 정보가 유출될 위험이 있고,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의사가 법적 분쟁에 휘말리게 되는 게 부당하다는 입장입니다.
의료계는 실손보험 청구가 간소화되면 보험료가 인상돼, 결국 소비자 부담이 늘어날 수 있다고도 지적합니다.
의료계 관계자는 “청구 전산화가 이뤄지면 낙전 수입이 감소해 손해율이 증가하고 이는 결국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청구하고 싶지 않은 진료가 있을 경우에도 내역이 전송되면 장기적으로 소비자에게 이로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소비자 단체도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꼬집곤 합니다. 보험업계가 주장하는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는 소비자 편익을 앞세우고 있지만 보험업계의 이익을 대변한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보험사들이 실손보험 가입자 정보를 활용해서 보험금 지급 거부 사유를 만들 수 있으며, 이는 곧 보험사에게 이익으로 돌아간다는 설명입니다.
소비자단체 관계자는 “청구 간소화는 가입자의 편의성보다는 공보험 전산망을 활용해 비용 절감 및 가입자 정보를 활용한 상품개발 등 보험업계의 이해에 목적을 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찬성측의 주장은?
보험업계는 청구 간소화가 곧 소비자 권익을 높이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간소화가 진행되면 실손 보험 청구가 간편해져 실손의료보험이 보장하는 실손 치료비를 가입자들이 모두 받을 수 있고 이것이 곧 소비자 권익 실현이라는 입장입니다.
보험업계는 서류 전송에 의료계의 역할이 있다고 말합니다. 의료법에서 의료기관이 제 3자에게 진료기록을 전송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신용 정보법에서도 금융기관 등이 소비자의 신용 정보를 제 3자에게 전송하도록 허용한다는 설명입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이미 의료기관에서 실손 청구 서류를 발급해주고 있으므로 청구 편의를 높이는 서비스 개선에 참여하는 것을 의료기관에 새로운 의무가 생기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법조계 관계자는 “의료기관이 보험계약의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환자의 의료기록 보유자로서 환자의 편익을 위해 협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아울러 보험업계는 의료계가 반대하는 속내는 '비급여' 항목의 정보 공개를 반대하는 것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정부가 비급여를 통제하게 되면 의료계의 수익에 직접적으로 영향이 생기기 때문에 이를 막고자 한다는 설명입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의료계의 반발이 심해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10년 넘게 지지부진한 상태"라며 "비급여 정보가 심평원으로 가게 되면 정부가 이를 통제할 수 있게 되니 의료계에서 반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간소화를 찬성하는 소비자 단체에서는 의료계가 주장하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염려는 비논리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개인 정보는 이미 소비자의 동의를 거쳐 제공되고 있으며, 종이로 청구 서류를 제출할 경우는 개인 정보가 보호되고, 전산으로 제출할 경우는 개인 정보 유출의 위험이 있다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설명입니다.
올해는 실현될까?
미지수입니다. 이재명 후보가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공약을 발표한 후 의료게에서 반발이 다시금 거세게 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재명 후보는 의료계나 보험사와 의견 조율을 진행한 바 없으며, 바로 입법으로 추진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의료계와 보험업계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단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대한병원의사협의회는 지난 10일 성명서에서 "실손보험 청구를 대행하게 되면 의료기관들은 국민 개인과 보험사 사이에 맺은 사적 계약의 편의를 위해 청구 대행 업무를 하게 됨으로써 행정 부담과 비용이 증가하게 되고, 보험금 지급이 거부됐을 때 환자들의 민원도 감당해야 한다"며 "국민 입장에서는 청구 과정에서 알리기 싫은 개인 정보가 항상 보험사에 노출되는 문제점이 있다"고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에 대한 반대 의견을 밝힌 바 있습니다.
사실 지난해에는 여야가 실손 청구 간소화를 위한 보험법 개정안을 모두 발의한 만큼 법안 통과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앞서 전재수, 고용진, 김병욱,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윤창현닫기윤창현기사 모아보기 국민의힘 의원이 ▲의료기관 전자증빙자료 발급 의무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위탁 등을 담은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23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 1소위원회가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관련 보험업법 개정안을 심사할 계획이었으나 또다시 논의가 불발됐습니다. 가상자산업권법 등에 우선순위가 밀려 논의 자체가 이뤄지지 않은 것입니다.
보험업계는 올해에도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할 방침입니다. 정희수닫기정희수기사 모아보기 생명보험협회 회장은 지난 13일 열린 비대면 기자간담회에서 “실손보험금 청구 전산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건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정지원닫기정지원기사 모아보기 손해보험협회 회장도 18일, 2022년 사업계획을 통해 "3900만 소비자가 가입한 실손보험 보험금청구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실손청구전산화 도입에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습니다.
임유진 기자 ujin@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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