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결자해지’ 자세로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 SK하이닉스가 메모리 한파 직격탄을 맞아 흔들거리자 박정호 부회장이 다시 위기 극복을 위한 해결사로 나섰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메모리 한파가 직격탄을 날렸다. 올해 상반기만해도 연일 ‘최대 매출’을 경신하던 국내 반도체 기업들 앞날이 순식간에 부정적 전망으로 바뀌고 있다. 내년엔 그 한파가 더욱 거세질 것이란 불안감이 크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 재고 일수는 올해 4분기말 39. 5주로 추정된다. 이는 약 10개월치 물량이다. 대개 반도체 기업들 재고일수가 80~90일임을 고려하면, SK하이닉스 재고는 약 3배 많은 수준이다.
증권가에서는 SK하이닉스가 올해 1조5000억원에 이르는 영업손실을 내고, 내년엔 5조원에 가까운 적자를 낼 것이란 암울한 전망도 나왔다.
다시 박정호 부회장이 나섰다. 그는 올해 SK 인사에서 겸직하던 SK스퀘어 대표직을 내려놓고 SK하이닉스 대표이사직만 맡았다. SK텔레콤, SK스퀘어 부회장직은 유지하지만 사실상 SK하이닉스 경영 정상화에 올인한다. 최태원닫기최태원기사 모아보기 SK 회장의 특명이다.
당시 소버린자산운용 자회사 ‘크레스트 시큐리티즈’가 SK(주) 주식을 14.99% 매입하고 1대 주주로 등극하며 SK 경영권을 압박했다. 국내 대기업에서 외국 자본이 최대 주주가 된 첫 사례로 유명하다. 헤지펀드 소버린이 SK그룹과 경영권 분쟁을 펼칠 때 최태원 SK 회장을 바로 옆에서 보좌한 이가 박 부회장이었다.
SK는 소버린 공세에 맞서 쿠웨이트 자본을 유치해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는데, 당시 회장 비서실장을 맡았던 박 부회장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버린 위기 상황을 겪으며 최 회장은 박 부회장을 크게 신임하게 됐다고 한다.
박 부회장은 1999년 SK텔레콤 경영권 위기 당시에도 문제해결에 앞장섰다. 헤지펀드 타이거 매니지먼트가 SK텔레콤 지분 6. 6%를 사들인 뒤 경영 간섭을 시작하자 당시 박 부회장은 11억달러 규모 SK텔레콤 신주 발행으로 맞섰다. 주식을 더 발행해 타이거 등 헤지펀드 지분율을 희석하려는 전략이었다.
결국 타이거펀드가 러시아에서 대규모 손실을 내면서 SK텔레콤 유상증자에 참여할 수 없게 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박 부회장은 “그때 내가 던진 돌(신주발행)은 합법이었다”라며 “하지만 간단한 얘기는 아니었고, 위기에 벗어나기 위해 정말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런 돌발적 위기만이 아니다. 구조적 위기 상황에서도 박 부회장은 해결사로 나섰다. 통신기업이었던 SK텔레콤을 AI(인공지능) 중심 기업으로 재편한 것도 그다. 1위 통신기업이지만 추가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해 통신에 치중한 사업포트폴리오를 AI, 미디어, 커머스, 모빌리티 등 미래 신사업 중심으로 다각화해 미래 성장을 이끌었다는 평가다. 박 부회장은 내년에 또 다시 위기의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내년 반도체 업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인 상황 속에서 영향을 최소화해야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고부가가치 제품을 중심으로 대응해야 한다. 수요를 기대할 만한 분야는 서버용 시장이다.
당초 DDR5는 올해 교체 수요가 본격화될 것이란 전망이 있었으나, 출시가 지연되면서 시장 상용화도 지연됐다. DDR5는 현재 상용화된 DDR4보다 속도가 2배 이상 빠르고, 전력 효율도 30% 이상 좋다.
특히 기업들이 데이터센터 투자를 확대하고 있어 내년 하반기 교체 수요가 커지면 메모리 가격 하락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 부회장은 최근 조직개편을 통해 ‘미래전략’ 산하에 ‘글로벌 전략’ 조직을 신설했다. 글로벌 불확실성 및 지정학적 이슈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또 글로벌 생산시설 전개와 지역별 이슈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CEO 산하에 ‘글로벌 오퍼레이션TF를 구성했다. 차선용 미래기술연구원 담당이 TF장을 겸직하게 된다.
박 부회장은 “이번 조직개편과 임원인사를 통해 회사는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는 변화에 도전할 것”이라며 “이를 통해 위기 앞에 강한 DNA를 일깨우면서 명실상부 글로벌 일류 기술기업을 향한 새로운 도약을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박 부회장 주재로 SK텔레콤, SK스퀘어, SK하이닉스, SK쉴더스 등 SK ICT 패밀리 주요 계열사와 함께 글로벌 전략 회의를 개최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글로벌 경제 이슈와 함께 지정학적 갈등으로 인한 불안 요소에 대응하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계열사 간 협력을 통해 위기 속 성장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의 다운턴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 속도와 유연성, 그리고 전문성과 다양성을 높이는 쪽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나아가 더 큰 미래 성장을 도모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은경 기자 ek7869@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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