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사들은 강력한 플랫폼 기반을 무기로 사업 영역을 공격적으로 확장하는 빅테크에 대응해 디지털·비금융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각종 규제로 인해 실질적인 사업 확장에는 한계가 있는 상황이었다.
금융위원회가 19일 발표한 금융규제혁신 추진 방향에는 ▲디지털 전환 촉진 ▲혁신 인프라 구축 ▲자본시장 선진화 ▲감독행정 개선 등 4대 분야의 9개 주요 과제, 36개 세부과제가 담겼다.
김주현닫기김주현기사 모아보기 금융위원장은 이날 금융규제혁신회의 출범식에서 모두발언을 통해 “금융규제혁신의 목표는 우리 금융산업에서도 BTS와 같이 글로벌 금융시장을 선도하는 플레이어가 출현할 수 있도록 새로운 장을 조성하는 것”이라며 “금융산업을 지배하는 어떠한 고정관념에도 권위를 부여하지 않고 근본부터 의심해 규제의 새 판을 짜겠다”고 강조했다.
빅테크란 인터넷 플랫폼 기반의 대형 정보기술(IT) 기업을 뜻한다. 미국에서는 ‘가파(GAFA)’로 불리는 구글·아마존·메타(페이스북)·애플이, 중국에서는 ‘바트(BAT)’로 칭해지는 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가 빅테크 대전을 펼치고 있다. 국내의 경우 네이버와 카카오 등이 온라인 플랫폼 제공 사업을 주축으로 하다가 금융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금융그룹들의 플랫폼 사업은 핵심 계열사인 은행의 뱅킹 앱을 중심으로 한 ‘슈퍼 앱’ 전환을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다. 현재 인터넷전문은행들은 1~2개의 앱만 운영하고 있다. 작년 10월 출범한 토스뱅크는 별도 앱을 만드는 대신 기존 토스 앱에 은행 서비스를 얹는 원(One) 앱 전략을 내세웠다. 별도 앱 개발이나 창구가 없어 절감되는 운영 비용으로 상품과 서비스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고 고객에게 혜택으로 돌려주겠다는 방침이다. 궁극적으로 토스 앱 하나로 모든 금융 거래를 해결할 수 있는 서비스를 목표로 토스 앱의 2000만 사용자를 흡수한다는 복안이다. 토스증권도 새로운 앱이 아닌 기존 토스 앱에 들어가 탭만 달리하고 있다. 카카오뱅크 역시 단 한 개의 앱으로 모든 업무를 볼 수 있다. 케이뱅크는 기업뱅킹과 개인뱅킹을 나눈 두 개 앱뿐이다.
KB국민은행의 ‘스타뱅킹’이 대표적이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10월 스타뱅킹을 KB금융그룹의 허브 역할을 수행하는 확장형 종합금융플랫폼으로 개편해 새롭게 선보였다. 국민은행 내 흩어진 앱뿐 아니라 그룹 계열사 서비스 70여개도 탑재했다. KB금융은 현재 2400만명에 달하는 국민은행 고객 기반을 바탕으로 올해 스타뱅킹의 MAU 목표치를 1500만명으로 잡았다.
신한은행은 지난 2018년 ‘신한S뱅크’, ‘써니뱅크’, ‘스마트실명확인’ 등 6개 앱을 하나로 합친 통합 앱 ‘신한 쏠(SOL)’을 출시했다. 현재 쏠의 UI(사용자환경), UX(사용자경험)를 디지털 고객의 성향을 반영해 개선하고 초개인화 마케팅을 더해 신기술 기반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뉴 앱(New App)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더해 금융권 최초로 출시한 배달 앱 ‘땡겨요’를 중심으로 생활금융플랫폼화에 속도를 더하는 중이다. 신한금융은 신한은행 ‘쏠(SOL)’의 올해 MAU 목표치를 1000만명으로 설정했다.
하나은행은 2020년 8월 모바일뱅킹 앱을 전면 개편해 하나의 앱에 전 계열사 금융서비스와 생활밀착형 제휴서비스를 담은 ‘뉴 하나원큐’를 선보였다. 현재 하나원큐를 원 앱·슈퍼 앱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은행도 2019년 8월 내놓은 새 모바일 뱅킹 앱 ‘우리원(WON)뱅킹’에 우리페이 서비스를 도입하는 등 원스톱 서비스 전략을 펼치고 있다. NH농협은행은 현재 운영 중인 7개 앱을 2024년까지 ‘NH스마트뱅킹’, ‘NH기업스마트뱅킹’, ‘올원뱅크’ 등 3개로 통합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바 있다.
디지털 금융은 이미 해외에서도 최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얼라이드마켓리서치(Allied Market Research)’에 따르면 글로벌 오픈뱅킹 산업은 2018년 72억9000만 달러(약 8조6969억원)에서 2026년 431억5000만달러(약 51조4779억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날 열린 금융규제회의에서 의장을 맡은 박병원 전 한국경영자총협회 명예회장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나라,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또 두들겨보는 나라가 일본인데, 금산분리(완화) 쪽에서 우리가 일본보다 늦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우리가 속도감 있게 움직이지 않으면 기술변화나 산업 변화에 대해 대응하는 게 늦을 수 있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는 각종 금융규제가 금융사들의 플랫폼 전환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금융사들은 각 협회를 중심으로 디지털 시장 진출 관련 규제를 완화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해 왔다. 금산분리, 전업주의 규제, 겸영·부수 업무 범위 제한, 계열사 간 정보공유 제한, 계열사 상품의 판매 비중 제한 등의 규제가 플랫폼 혁신을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빅테크들이 디지털 혁신을 내세워 금융으로 영역을 빠르게 확장하자 강력한 규제의 적용을 받아온 기존 금융회사들은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은행권은 영위할 수 있는 부수 업무로 음식배달, 통신, 가상자산, 유통 등을 허용하고 생활 밀착, 부동산, 가상자산 등 업종 제한 없이 자기자본 1% 이내로 투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금융지주 계열사 간 영업 목적 정보공유를 고객 동의 없이도 할 수 있도록 하고 은행·증권·보험 등 계열사 서비스를 한번에 제공하는 슈퍼 앱 구현을 위한 플랫폼 사업 허용하는 방안 등도 은행권 건의 사항에 담겼다.
이 같은 요구를 반영해 금융위는 주요 추진과제 중 하나로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꼽았다. 금융업계의 디지털화가 가속화하고 산업 간 경계가 흐려지는 빅블러(Big-blur) 시대가 도래했지만 기존 금융규제가 금융혁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게 금융위 진단이다. 금융위는 금융산업이 신기술과 산업구조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새로운 규제체계를 모색하기로 했다. 김 위원장은 “금융사의 정보기술(IT)·플랫폼 관련 영업과 신기술 투자가 활성화하도록 업무 범위와 자회사 투자 제한을 개선하는 방안을 우선 검토하겠다”고 했다.
자회사 투자 제한이 풀리면 은행도 사용자환경 및 경험(UI·UX) 디자인회사나 부동산 등 생활 서비스업체, 중소기업 사업지원을 위한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 영상‧문서 관련 디지털 인식기술 업체 등을 인수할 수 있게 된다. 부수 업무 규제 완화를 통해선 음식배달중개 플랫폼 등의 사업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예컨대 신한은행의 배달 플랫폼인 ‘땡겨요’는 일정 기간 규제 예외를 적용받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한시적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부수 업무로 인정될 경우 서비스를 지속할 수 있다.
금융위는 이와 함께 업무위탁, 실명확인, 보험모집 규제 등 개선을 통해 외부자원 및 디지털 신기술 활용도 활성화하기로 했다. 디지털 유니버설 뱅크, 온라인 예금·보험 중개플랫폼 등 다양한 사업모델이 가능한 유연한 규제체계도 구축한다. 금융 계열사 통합 앱에서 고객 맞춤형으로 카드, 보험, 증권 등 다양한 상품을 추천하기 위해서는 은행 고객 정보의 계열사 간 공유가 필요하지만 현재는 고객 동의를 받아도 고객 정보 공유가 허용되지 않는다.
금융권은 규제 완화가 이뤄지면 전통 금융사들의 플랫폼 사업과 비금융 업종 진출이 본격적으로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그간 새로운 혁신 서비스를 고안해내도 각종 규제에 가로막혀 플랫폼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는데 금산분리 등이 완화되면 소비자 트렌드에 맞는 서비스 제공이 가능해지면서 빅테크와의 경쟁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규제개선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이해관계 상충 문제와 관련해선 금융사들과의 논의를 통해 합의점을 찾겠다는 입장이다. 김 위원장은 “감독 당국과 업계가 투명하게 논의하고 필요하면 과정도 다 공개해서 국민적인 합의가 되는 방식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아란 기자 aran@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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