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행장 이원덕닫기이원덕기사 모아보기)에서 600억원대 달하는 역대급 횡령사건이 발생했다. 제1금융권인 시중은행에서 유례없는 대규모의 횡령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거액이 직원 개인 계좌로 빠져나가는데도 첫 범행 이후 10년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을 두고 내·외부 회계 관리 시스템이 사실상 마비됐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내부통제 기준을 마련하고 관리해야 하는 경영진은 물론 지난해 종합검사를 진행했던 금융감독원에 대한 책임론도 제기된다.
해당 직원은 10년 넘게 우리은행에서 재직한 직원이다. 구조 개선이 필요한 기업을 관리하는 기업개선부에서 일하면서 2012년부터 2018년까지 6년간 세 차례에 걸쳐 614억 5214만여원(잠정)을 개인 계좌로 인출한 것으로 파악됐다. 해당 직원은 횡령 사실이 발각된 뒤 잠적했다가 서울남대문경찰에 자수했고, 특정경제범죄처벌법 위반(횡령)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공범 혐의를 받고 있는 해당 직원의 동생도 체포됐다.
돈이 빠져나간 시점은 2012년 10월 12일, 2015년 9월 25일, 2018년 6월 11일 세 차례다. 횡령 자금은 대우일렉트로닉스(현 위니아전자)를 인수하려던 이란 가전업체 엔텍합이 우리은행 등 채권단에 지급했다가 계약 불발을 이유로 몰수한 계약보증금의 일부로 알려졌다. 2010~2011년 대우일렉트로닉스 매각 주관사였던 우리은행은 이 돈을 일종의 특별계좌에서 관리했다. 이란 측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에서 이기고도 730억원을 돌려받지 못하다가 최근 제재가 풀려 은행 측이 송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횡령 사실이 드러났다. 횡령에 사용한 개인 계좌는 2018년 마지막으로 인출이 이뤄진 직후 해지됐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자체 조사를 진행하면서 수사기관의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횡령 규모도 금융사고로서는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은행권에서 발생한 금융사고 규모는 7개 은행, 총 116억3000만원이었다. 이 중 횡령·유용은 67억6000만원, 배임 41억9000만원, 사기 6억8000만원 등이었다. 과거로 범위를 넓히더라도 대규모 횡령 사건은 소수에 불과하다. 2005년 조흥은행에서 자금 결제 담당 직원이 공금 400억원을 빼돌려 파생금융상품에 투자를 하다 적발됐고, 2013년에는 국민은행 직원이 국민주택채권 90억원어치를 횡령한 사건이 있었다.
우리은행이 내부 감사를 통해 횡령 사실을 인지하고 경찰에 고소장을 접수한 시점은 지난 27일이다. 거액의 자금이 직원 계좌로 빠져나가는 데도 첫 범행 후 10년가량이 지난 시점에야 횡령 정황을 포착한 셈이다. 이를 두고 금융권에선 우리은행 내외부 통제시스템이 사실상 마비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허술한 내부통제 시스템이 장기간 방치된 데 따른 경영진에 대한 책임론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앞서 금감원은 우리은행의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불완전판매와 관련해 제재를 결정한 바 있다. 정은보닫기정은보기사 모아보기 금감원장은 '외국계 금융사 CEO 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나 “내부통제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전문가로서 정당한 주의 업무를 게을리했다면 그에 대한 사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우리은행 CEO 제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사를 해봐야 한다"며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우리은행 회계감사를 맡았던 회계법인도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안진회계법인은 2004년부터 2019년까지, 삼일회계법인은 2020년부터 올해까지 3년간 우리은행 외부 회계감사를 맡았다. 이들 회계법인은 우리은행에 모두 '적정' 감사 의견을 냈다. 내부회계관리제도 운영실태에 대해서도 문제점이 없다는 취지의 의견을 냈다. 횡령 사고가 벌어졌던 기간(2012∼2018년) 우리은행의 회계감사인은 안진회계법인이었다.
이와 관련 금융감독원은 안진회계법인에 대한 현장 조사에 착수해 감리를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정 원장은 “회계법인은 감사를 할 때 시재(보유 현금)가 확실히 존재하는지, 그리고 재고 자산으로 존재하는지 꼭 봐야 한다”며 “어떤 연유로 조사가 잘 안 됐는지 봐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금감원은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2개월간 우리은행에 대한 종합검사를 실시했지만 은행이나 회계법인과 마찬가지로 횡령 문제를 잡아내지 못했다. 금감원은 지난 27일 오후 우리은행의 보고를 받고 사건을 인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28일 우리은행 현장 검사 나섰다. 금감원이 우리은행 검사를 허술하게 했다는 정황이 나올 경우 감사원 감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정 원장은 그동안 금감원이 검사나 감독을 통해 우리은행 직원의 횡령 사건을 적발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치권에서는 금융사 내부통제제도 강화를 위한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회 정무위원회·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돈 관리에 가장 엄격해야 할 시중은행에서 600억원대의 대규모 횡령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10년 가까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자 은행의 내부통제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라며 “내부통제기준에 담겨야 할 내용을 구체화하고, 내부통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은행장이나 경영진에게 책임을 묻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행 ‘금융회사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금융회사는 그 임직원이 직무를 수행할 때 준수해야 할 내부통제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총괄할 준법 감시인을 둬야 한다. 그러나 현행법은 내부통제기준에 담겨야할 구체적인 내용이나, 내부통제기준을 위반했을 때의 제재 조항 등이 없어 그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김 의원은 지난 2020년 7월 대표 발의했던 개정안에 대한 국회의 조속한 심의를 요청했다. 이 법안은 은행장이나 경영진, 준법감시인 등이 내부통제시스템에서 수행하는 업무를 명확히 하고 이를 준수하지 않은 임원에 대해 제재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아란 기자 aran@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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