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서울의 지역자산은 과거의 흔적에만 머물지 않는다. 역사와 문화는 지역의 정체성이 되고, 잘 보존된 공간은 관광과 교육·일자리와 도시재생 등 새로운 지역발전의 기반이 될 수 있다. 한국금융신문은 이번 기획에서 서울 10개 자치구를 찾아간다. 지역의 유산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으며, 주민과 행정은 이를 미래의 가치로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지 현장에서 살펴본다. 과거를 보존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거가 미래의 자산이 되는 서울을 찾아본다. <편집자 주>
지난 18일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과 제기동 일대 서울약령시를 찾았다. 이날은 점심 미팅에서 반주를 곁들인 뒤 시작한 취재였다. 두 달 전부터 약속한 일정이었기에, 미루지 못하고, 결국 적당히 마신 술기운을 안고 약령시에 들어섰다.
서울약령시는 동대문구 용두동과 제기동 일대에 형성된 국내 최대 규모의 한약재 시장이다. 한눈에 봐도 차도부터 골목골목까지 한의원과 한약방·약재상 등 한의약 관련 업소가 300여곳을 훌쩍 넘는 듯 했다.
실제로 전국 한약재의 상당량이 이곳을 거쳐 유통될 정도로 국내 한약재 유통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의 역사는 조선시대까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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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서울미래유산 자료에 따르면, 현재 서울약령시가 자리한 제기동 일대에는 조선시대 보제원(普濟院)이 있었다. 보제원은 국가가 운영한 구휼·의료기관으로 가난하고 병든 백성을 돌봤다. 나그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노인을 위한 기로연을 베푸는 역할도 했다.
오늘날의 서울약령시가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보제원은 조선시대의 구휼·의료기관이고, 현재의 서울약령시는 근현대에 형성된 한약재 시장이다. 다만 같은 공간에서 사람을 치료하고 약재와 관련된 기능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적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약령시라는 시장의 역사도 별도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약령시는 전국 각지의 약재를 모아 거래하고 다시 각 지역으로 보내는 유통 거점이었다. 서울시 자료는 우리나라 약령시의 기원을 조선 효종 때 한약재 수집과 유통을 위해 왕명으로 설치한 시장에서 찾고 있다.
대구와 전주, 원주 등에서도 약령시가 형성됐다. 공통점은 약재 산지와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다는 점이다. 약령시는 단순히 약재를 사고파는 장터가 아니라 약재를 모으고 거래하고 전국으로 보내는 유통망이었던 셈이다.
현재 서울약령시의 직접적인 형성 과정은 1920년대부터 본격화된다. 당시 경기와 강원 지역 농민들이 농산물과 임산물을 서울로 가져왔다. 옛 성동역과 청량리역을 이용해 물건이 이 일대로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됐다. 철도가 시장을 만들고, 시장이 다시 상권을 키운 모양새다.
청량리는 서울 동북부와 지방을 잇는 교통 요지로, 경기·강원 지역에서 생산된 물품을 서울로 가져오기에도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에 농산물과 임산물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상업적 기반이 만들어졌고, 이후 한약재 상인들이 모이면서 시장의 성격도 달라졌다.
서울약령시가 지금과 같은 한약재 유통 중심지로 성장한 중요한 시기는 1960년대다. 1960년 6월 시장 개설 허가가 이뤄졌고, 이후 청량리역과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 등을 중심으로 한약 상인들이 모였다. 1962년 무허가 시장 통폐합 과정에서 시장 규모가 커졌고, 1960년대 후반부터 약재상과 한의원이 집중되면서 국내 최대 한약 유통 중심지로 성장했다.
오랜 시간이 쌓이면서 약령시는 현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살아 있는 시장으로 남아 있다.
거리로 들어서자 상인들과 손님들이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서는 어르신들과 상인들이 물건을 놓고 흥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된 시장 특유의 풍경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장면도 있었다. 외국인 관광객이 눈에 띄게 많았다. 일본어와 중국어가 거리 곳곳에서 들렸다. 약재를 살펴보며 상점 앞을 오가는 외국인들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한 중국인 관광객에게 약령시에 왜 왔는지 물어봤다. 구글 번역기를 켜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지만 돌아온 답은 “노 땡스”, “댓츠 오케이”였다. 두 딸의 아빠이자 평소 인상 하나만큼은 자신했던 기자에게는 꽤나 뼈아픈 순간이었다. 중국인들에게 먹히지 않는 얼굴을 조용히 아래로 내리며, 주변 상인들에게 외국인 관관객이 늘어난 이유를 물었다.
한 상인은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난 배경으로 '케이팝 데몬헌터스'와 한방에 대한 관심을 꼽았다. 또 다른 상인은 최근 한방 관련 콘텐츠가 해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외국인 방문객이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이 대목은 서울약령시가 단순한 전통시장에 머물지 않고 관광자원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시장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서울한방진흥센터)가 나온다. 약령시의 과거를 보여주는 동시에 한방문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은 동대문구가 설립한 공립박물관이다. 2006년 9월 13일 문을 열었으며 한의약 관련 유물과 한약재 등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시대 보제원 모형과 한방체험실·다목적 강당·휴게공간 등도 갖췄다.
이곳에서는 단순히 전시물을 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의약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대표적인 체험이 약초족욕이다. 2층 야외 정자에서 20분간 진행되며 계절에 따라 사용하는 입욕제 재료도 달라진다. 봄에는 쑥과 딸기, 여름에는 박하 등을 활용된다고 한다.
술기운을 깨느라 약령시를 찾았던 기자에게는 꽤나 솔깃한 체험이었다. 다만, 오후 4시께 체험이 마감이라는 안타까운 안내는 받고, 관광객들의 체험을 구경하는데 만족했다. 단순히 구경하는 것으로도 시원한 박하향이 2층을 메우면서, 박하공기를 힘껏 들이마시고, 한방재 탐방에 나섰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든다. 눈앞에 놓인 것이 진짜 한방약? 등산하다가 본 나뭇가지와 한번은 길가에서 주워본적 있는 나뭇껍데기와 더불어 녹용·거북이·뱀·개구리·지네 등이 특화·희귀약재에 속해 있다.
재료들의 이름과 쓰임새를 하나씩 확인하다 보면, 그저 말라버린 나뭇가지와 뿌리였던 것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누군가의 몸을 위해 선택되고, 손질되고, 약으로 만들어졌던 재료라는 사실이 뒤늦게 실감난다.
다만, 글을 쓰는 현재 생각나는 약재는 동충하초 뿐이라는 게 함정, 자주 접하고 가까이해야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현대에서 접하기 힘든 전통 의약기구들이 나열돼 있다. 요즘이야 약재를 정밀하게 계량하고 기계로 분쇄하는 일이 익숙하지만, 이곳에 놓인 도구들을 보고 있으면 과거 조상님들이 한방약 한 첩을 만들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의학이 어려운 의학 용어나 오래된 기록 속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픈 배를 달래고 몸을 돌보는 생활 속 의료문화였다는 점도 이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전시장 안에서 보던 약재가 실제 거리의 한약재 상점과 연결되고, 전시장에 진열된 도구와 약방의 모습이 과거 이 일대에서 오갔을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박물관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저 ‘한약재가 많은 동네’였던 제기동이 전시를 보고 난 뒤에는 조금 다르게 보이는 이유다.
전시관 초입에 위치한 동의보감 등 옛 의서를 보고 있으면 한의학이 단순히 오래된 민간요법의 모음이 아니라 오랜 시간 지식과 경험을 기록하고 축적해온 하나의 의학 체계였다는 점도 엿볼 수 있다. 물론 한자로 빼곡한 옛 의서를 마주하면 머리가 멍해지는 것은 어쩔수 없는 현상도 있을 수 있다.
과거의 약재와 약방, 옛 의서 이야기를 지나오면 마지막에는 한의약의 정책과 미래비전을 다루는 공간이 등장한다. 전통의학으로 시작한 한의약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세계시장과 글로벌화, 현대화·선진화 등 앞으로의 방향을 살펴볼 수 있다.
감히 판단하자면, 약령시박물관의 뿌리와 열매에서 시작한 전시는 약재를 다루던 도구를 만나고, 약전한약방을 지나 서울약령시가 만들어진 역사를 버여주는데 목적을 두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약재에서 시작해 사람으로, 사람에서 시장으로, 시장에서 역사로, 그리고 다시 미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관을 다 보고 밖으로 나오면 제기동의 약령시 골목이 아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조금 전까지는 그냥 지나쳤던 한약재 가게의 진열대가 눈에 들어오고, 가게 앞에 놓인 이름 모를 약재 하나에도 괜히 한 번 더 시선이 간다.
2층 전시관을 한 바퀴 돌고 1층으로 내려오자, 이번에는 보제원 전통복을 차려입은 외국인들이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박물관 관계자에 따르면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서는 보제원 전통옷을 직접 입어보는 체험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전시관을 돌며 옛 한의학과 약방의 모습을 보고 내려와서인지, 문득 중학생 시절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 ‘허준’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그저 흥미롭게 봤던 사극 속 이야기가었지만, 실제 약재와 의약기구, 옛 약방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나니 조금은 다르게 다가왔다.
서울약령시를 찾는 이유도 달라지고 있고 평가하고 싶다. 과거에는 약재를 사고파는 것이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한방문화를 경험하고 시장을 둘러보는 관광객도 늘고 있다.
약령시를 걸으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오래됐지만 멈춰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병든 백성을 돌보던 보제원이 있었고, 근현대에는 철도를 따라 농산물과 약재가 모였다. 1960년대 이후에는 한약재 유통 중심지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은 여기에 박물관과 체험, 관광이 더해졌다. 약재를 사고파는 시장이라는 본래 기능은 여전히 살아 있다. 동시에 과거의 역사와 한방문화를 관광객에게 보여주는 공간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300여년에 걸친 한방문화의 시간이 단순히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역 자산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서울약령시가 미래의 지역 자산으로 바뀌는 과정은 지금도 이 골목에서 진행 중이다.
주현태 한국금융신문 기자 gun1313@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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