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십 년간 글로벌 경제를 지배해온 원칙은 '가성비(비용 대비 성능)'였다. 하지만 이제 그 시대가 저물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넷제로(Net-Zero)'는 환경단체의 구호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던 게 이제 국가의 산업 패권과 기업 생존을 결정지을 날카로운 무기로 바뀐 것이다.
삼정KPMG 경제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넷제로 경쟁의 시대, 탄소중립을 넘어 산업패권 경쟁으로' 보고서는 이 같은 상황 변화를 조목조목 짚어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넷제로 담론은 과거 '지구 환경보호'라는 보편적 가치에서 '자국 산업보호와 미래 첨단산업 주도권 선점'이라는 경제안보 영역으로 이동했다. 기후변화 대응은 지난 2015년 파리협정 이후 국제사회의 연대와 협력에 기반했지만 지금은 무역장벽과 보조금이 결합된 치열한 '그린전쟁'으로 바뀌었다.
바뀐 게임의 법칙…가성비 압도하는 탄소효율성
과거엔 기업 경쟁력이 가격과 품질에 의해 결정됐다. 이젠 핵심변수가 제품 생산 전 과정에서 탄소배출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지를 나타내는 '탄소효율성(Carbon Efficiency)'다. 애플, BMW, 구글 등 글로벌 선도기업들은 이미 2030~2050년을 목표로 공급망 전반의 탄소중립(스코프3)을 선언했다. 협력사들에게 무탄소 전원 사용과 탄소데이터 제출을 요구한다.미국·유럽·중국·일본 4색(色)전략 "자국 우선주의"
보고서는 주요국들이 산업구조와 자원에 따라 서로 다른 그린전환 전략을 추진하며 글로벌 통상질서를 재편 중이라고 진단했다.미국은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배터리, 반도체 등 청정에너지 산업의 본국 귀환(리쇼어링)를 추진해 왔다. 트럼프닫기
트럼프기사 모아보기 2기 정부는 '에너지 지배력 확보'와 '자국 중심 제조업 강화'를 목표로 자국이익 우선 기조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해외오염부담금법(FPFA) 등을 논의하면서 탄소집약적 수입품에 비용을 부과해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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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국가 주도로 대규모 보조금을 주면서 신에너지 공급망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리튬·코발트 등 핵심 광물 정제부터 배터리·태양광·전기차 등 완제품에 이르는 전 가치사슬을 장악해 가격경쟁력과 공급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전략이다.
일본은 GX(Green Transformation)추진법을 제정해 약 20조 엔 규모의 'GX 경제이행채'를 발행하면서 민간투자를 유도하는 '전환금융' 모델에 집중하고 있다.
생산거점, 싼 인건비보다 '무탄소 에너지' 우선
기업들의 입지 선정 기준도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저렴한 노동력과 물류 접근성이 최우선이었다. 이제는 무탄소 에너지(CFE)의 안정적 확보 가능성이 더 중요한 요인이다.반도체·이차전지·데이터센터 같은 전력집약 산업에서는 무탄소 전력 공급능력이 제품경쟁력으로 직결된다. 따라서 기업들은 단지 비용이 싼 곳을 찾기보다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등 무탄소 전원(CFE)이 풍부한 곳으로 생산거점을 재배치하는 쪽으로 입지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AI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 폭증도 넷제로 경쟁을 가속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운영에 필요한 막대한 전력을 무탄소 전원으로 충당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면서 디지털 기술과 그린산업 결합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셈이다.
자본 대이동 "고탄소 업종 돈줄 말라"
투자 기준도 급변한다. 글로벌 자본시장은 단순히 고탄소 업종을 배제하는 단계를 벗어나 기업의 실질적인 탄소 감축전략과 실행 역량을 지원하는 '전환금융(Transition Finance)' 중심으로 진화 중이다. 글로벌 지속가능채권 발행 규모는 2015년 약 400억 달러였던 게 2025년 1조 달러 규모로 커졌을 것으로 추산된다. 투자자들도 기업들의 현재 탄소배출량보다 '현실적 탈탄소 경로'를 가졌는지를 중요하게 평가한다. 자연히 탈탄소 역량은 기업의 자본조달 비용에도 영향이 미치는 상황이다.
한국 '전환 실행력'에 사활 걸어야
한국은 지난해 기준으로 제조업 비중이 GDP의 약 27.2%에 달한다. 특히 철강·석유화학 등 에너지 다소비 산업이 주축인 만큼 넷제로 경쟁 파고를 넘기가 쉽지 않다. 정부가 원전과 수소 등 다양한 무탄소 전원으로 기업의 에너지 조달 선택권을 넓히려 노력하고 있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다.보고서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넷제로 경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다섯 가지 경쟁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과 자본 재배치 ▲시장·생산거점의 전략적 재조정 ▲저탄소 공정 혁신과 제품 차별화 ▲공급망 탄소 리스크 관리와 핵심자원 확보 ▲탈탄소 솔루션 기반 신사업 창출이 그것이다.
보고서는 단순한 탄소규제 대응을 넘어 탄소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관리하고 공시하는 '디지털 전환(DX)' 역량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탄소 정보를 통합관리하는 시스템(LCA·스코프3)을 구축하고, ISSB(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 등 글로벌 공시 기준과 연계해 시장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 산업 패권은 자원을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 보다 누가 더 빨리 탄소효율성을 가진 산업생태계를 구축하는가에 달렸다는 진단이다. 넷제로 경쟁시대에서 승자는 탄소 효율성을 경제적 가치로 전환하는 '실행력'을 갖춘 곳이 될 전망이다.
장종회 한국금융신문 기자 jhchang@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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