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이 가장 잘 적용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 금융위기라고 생각한다. 금융위기를 겪은 사람만이 위기에 대해서 피가 통하는 산지식을 축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두 망각해버린다.
이 증후군은 금융위기는 다른 시기에 다른 국가의 다른 사람이 겪는 것이지 현재 자기들에게는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호황은 과거에 위기를 겪기 전의 호황과는 달리 건전한 경제 펀더멘털, 구조개혁, 기술진보, 우수한 정책 등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인하트와 로고프는 과거 8세기 동안 발생한 각종 위기 사례를 수집해 분석해본 결과 신흥시장국 중심으로 발생하는 외환위기(currency crisis)는 최근 들어 발생 빈도가 줄어들고 있어서 각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노하우를 어느 정도 축적해 나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반면 선진국이나 신흥시장국에 균등하게 발생하는 금융위기(financial crisis)는 발생 빈도가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인류가 아직까지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노하우를 갖지 못하고 있으며 아마도 금융위기는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과제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고 볼 수 있다.
밥 호프의 풍자와는 달리 은행은 돈을 빌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여윳돈을 돈을 빌릴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중개역할을 담당하는 영업을 수행한다. 이러한 중개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은행의 부채는 주로 예금이나 단기 차입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항목들은 만기가 짧고 안전성이 높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은행의 자산은 주로 대출이나 채권 등 증권 투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만기가 길고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항목들이다. 은행은 짧은 만기의 안전하고 유동성이 높아 언제든지 현금화가 가능한 예금과 같은 상품으로 조달한 자금을 떼일 위험이 크고 유동성이 낮은 형태로 장기로 빌려준다. 이러한 거래를 통해 은행은 예금 등 부채에 지급하는 금리보다 높은 수익률 획득을 통해서 이익을 실현한다.
이러한 기능은 본질적으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신뢰 상실에 대한 공포심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다시 말하면 화폐금융의 연금술이라고 지칭되는 단기 예금으로 자금을 조달해 장기로 대출해주는 만기 변환(maturity transformation)과 위험이 낮은 예금을 이용해 신용 및 유동성 위험이 큰 형태로 대출하거나 위험 자산에 투자하는 리스크 변환(risk transformation)이 순기능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금융거래 당사자 간에 신뢰가 필수적이다. 현실적으로 신뢰는 사소한 헛소문에 의해서도 쉽게 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2가지 연금술이 금융중개업의 원죄(original sin)라고 볼 수 있으며 금융 시스템의 불안을 초래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은행의 자산과 부채간의 만기 불일치는 아무리 건전한 은행이라도 신뢰가 훼손되면 예금이 대규모 인출되는 뱅크런(bankrun)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은행의 예금자들이 은행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는 경우 은행이 장기로 대출한 자금을 즉시 회수할 수 없기 때문에 자산 가치가 부채 가치보다 높은 상환능력이 있는 은행도 파산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은행들이 차입으로 조달한 자금에 비해 손실을 흡수할 수 있는 완충제 역할을 하는 자기자본을 매우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도 은행을 신뢰의 위기에 더욱 취약하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은행이 과도한 리스크를 추구하는 것을 제약하는 규제와 예금보험과 같은 금융 안전망의 구축을 통해서 은행의 일시적인 불안정성이 뱅크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을 축소하고 있다. 이러한 금융 안전망은 일반 보험과 마찬가지로 보험 가입 후에는 가입 전에 비해 위험 추구 행태가 심해지는 소위 모럴 해저드(moral hazard) 문제에 자유롭지 못하다.
실제로 미국의 대공황 이후 예금보험공사 설립에 관한 법적 근거 조항이 포함된 글래스-스티걸 법(Glass-Steagall Act of 1933)에 서명한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도 예금보험 조항의 삭제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가 예금보험 조항을 반대한 것은 예금보험이 도입되면 은행 경영진의 방종과 은행과 예금자 모두의 부주의를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금보험이 관대할수록 예금자들이 더욱 방심하게 되고 은행들이 과도한 리스크를 추구하지 않도록 하는 규제당국의 업무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는 점도 그의 반대 이유 중의 하나이었다.
예금보험제도가 우여곡절 끝에 도입되었다고 금융위기가 완전히 차단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은행을 포함한 금융기관들은 예금 보험 대상이 아니고 시장 상황에 따라 신속히 인출될 수 있는 자금 조달 수단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이들 금융기관들은 금융 시스템의 신뢰성에 대한 우려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은행을 포함한 금융기관들이 만기변환 서비스와 개인과 기업에 대해 위험도가 높은 장기 대출 업무를 제공하고 있는 한 건전성 규제와 금융안전망을 통해서 이러한 위험을 축소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금융기관이 제공하는 신용(credit)은 라틴어로 믿음(belief)의 의미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금융기관은 신뢰를 바탕으로 영업을 하는 기업이다. 신뢰도가 훼손된 금융기관은 기능할 수 없으며 신뢰도는 합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이유에서 순식간에 훼손될 수 있지만 훼손된 신뢰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역사적으로 금융위기는 금융 시스템 전반에 걸친 신뢰의 위기(crisis of confidence)라고 볼 수 있다. 즉 뱅크런은 사람들이 은행의 신뢰도 훼손을 우려해 예금을 인출하게 되고 이러한 인출이 은행시스템 전체에 남아있는 예금의 안전성이 저하되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예금자들도 예금 인출을 서두르게 되면서 뱅크런은 은행시스템 전체로 확산된다.
이러한 문제는 은행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발생시 은행 규제의 사각지대인 그림자 은행(shadow banking)부문의 대형 기관들도 은행들과 동일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들은 자금을 예금보다는 은행과 다른 금융기관들로부터 차입을 통해서 조달하지만 신뢰도의 훼손 위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투자한 자산에 대한 신뢰도가 훼손되면 이들에게 자금을 빌려준 기관들이 자금을 즉각 회수하게 된다. 상환자금 부족에 직면한 이들 그림자 은행들은 보유자산의 급매 처분하게 되고 급매물의 증가는 다시 자산가격의 추가 하락을 통해서 손실 증가와 신뢰 훼손의 악순환 과정이 발생하게 된다.
이 과정은 ‘신뢰도에 대한 우려 → 예금 인출 또는 차입금 상환압력 증가 → 유동성 부족 → 자산의 급매처분(fire sale) → 자산 가격 추가 하락 → 담보자산을 추가해야 하는 마진 콜(margn call) 증가 → 신용 수축(credit contraction) → 금융시스템으로부터 탈출 쇄도(stampede for exit)’로 이어지는 악순환이다. 이러한 이탈 쇄도가 발생하면 신속히 서둘러 이탈하는 것이 손실을 피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공포심은 인간 심리를 한 방향으로 고착시키는 동시에 군중심리(herd mentality)를 강력히 작용하도록 하기 때문에 이러한 탈출 쇄도를 예측하기 불가능하고 일단 발생하면 멈추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금융시스템은 수많은 민간 참여자들 간의 계약들을 바탕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금융위기가 일단 발생하게 되면 투자자와 채권자들은 자신들이 부실 위험에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지 그리고 계약 상대방의 위험 노출 정도에 대한 불확실성이 확대된다. 거래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면 금융중개와 관련된 거래가 붕괴되면서 금융시스템은 작동하지 않게 된다.
김성민 교수(전.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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