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실명계좌 기준을 새로 마련한다. 실명계좌를 발급하는 은행 요구사항을 수렴한 결과다.
일각에선 현재 시장 점유율 90%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업비트(Upbit‧두나무 대표 이석우닫기이석우기사 모아보기) 독점 체제가 굳어질 것이란 우려 목소리가 나온다.
업비트 수수료가 타사 대비 낮고 사용자 편의성이 높은 등의 서비스 질이 우수하단 측면도 있겠으나 시스템 자체가 경쟁사를 늘리지 않는 쪽으로 간다면 현행 체제가 바뀌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실명계좌 발급 기준’ 어떻길래 비판 목소리가?
이달 초 한국 디지털 자산 사업자 연합회(KDA‧회장 강성후는 금융위원회(위원장 김주현닫기김주현기사 모아보기) 산하 금융정보분석원(FIU‧원장 이윤수)이 마련 중인 ‘은행 실명계좌 발급 기준안’을 두고 비판 목소리를 냈다.
FIU가 이르면 다음 달 발표하려고 초안을 만들어 은행과 공유 중인데 해당 내용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다수의 가상 자산 거래소들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이미 구조화된 업비트 중심의 5대 원화거래소 체제를 더욱 고착화한다는 문제 제기였다. 국내 5대 원화거래소는 업비트를 비롯해 ▲빗썸(Bithumb‧빗썸 코리아 대표 이재원닫기이재원기사 모아보기) ▲코인원(Coinone·대표 차명훈) ▲코빗(Korbit·대표 오세진) ▲고팍스(GOPAX·스트리미 대표 이중훈)를 지칭한다.
당시 KDA 발표 자료에 따르면, FIU가 신고 수리한 27개 가상 자산 거래소 시장점유율에서 업비트는 90%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2위인 빗썸이 고작 8%에 그쳤고, 이외 25개 거래소는 2% 정도에 머물렀다.
당국이 이르면 다음 달 발표할 ‘실명계좌 발급 기준’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길래 이러한 반발이 나온 걸까?
기준안의 핵심은 ‘은행이 자금 세탁 방지(AML·Anti-Money Laundering) 역량을 충분히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가상 자산 거래소에 실명계좌를 발급할 수 있어서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금융감독원(원장 이복현닫기이복현기사 모아보기)의 AML 점검 이력 ▲FIU 위험관리 평가 최근 2년간 최소 4회 ‘보통 이상’ 등급 ▲은행연합회(회장 김광수닫기김광수기사 모아보기) 실명 계정 운영지침 이행 등의 내용이 담겼다.
2개 이상 복수 거래소에 실명계좌를 발급할 수 있는 은행 요건으론 △2년 이상 실명 계정 운영 경험 보유 △FIU 위험관리 평가 최근 2년간 최소 4회 ‘양호 이상’ 등급 △의심 거래 보고 의무(STR·Suspicious Transaction Report) 상세 분석률 최근 2년간 최소 4회 ‘상위 35%’ 이내 등으로 규정했다.
KDA는 이 기준이 과도하단 입장이다.
강성후 KDA 회장은 “토스뱅크(대표 홍민택닫기홍민택기사 모아보기)와 같이 업력이 짧은 신생 은행이나 규모가 작은 지방은행, 저축은행 등은 실명계좌 발급을 할 수 없다고 한정한 것은 업비트 등 5대 원화거래소 체제를 공고히 하겠다는 말과 같다”며 “이러한 기준안은 특정 금융 정보법 및 시행령에도 근거가 없는 것으로, 행정작용은 법률에 위반돼서는 안 되고 국민 생활에 영향을 중요하게 미치는 경우엔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는 행정 기본법 제8에 의한 ‘법치행정 원칙’을 위반한 위법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특정 금융 정보법 제7조 2항 2호 및 가상 자산 사업자 신고 매뉴얼(Manual‧설명서)을 보면, 가상 자산 사업자 신고 조건에 ‘은행 실명 계정 발급 확인(서)’라고만 규정할 뿐 다른 추가적인 내용이 없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당국이 기준안 마련에 있어 의견수렴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단 문제도 꼬집었다.
KDA 관계자는 “FIU가 기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은행과 기존 5대 원화거래소들만을 대상으로 의견을 듣고 FIU가 신고 수리한 27개 거래소의 82%에 해당하는 22개 코인 마켓 거래소 의견수렴은 베재했다”며 “이는 헌법 및 행정 기본법에 의한 평등권과 행정절차법에 의한 의견수렴을 거치지 않은 위법한 행정행위”라고 목소리 높였다.
그러면서 “FIU가 은행 실명 계정 발급 기준을 제정‧시행하려면 사전에 이해 당사자들과의 충분한 소통‧의견수렴 과정을 거치고 위법성 논란을 해소할 수 있도록 특정 금융 정보법을 개정해 근거 확보 뒤 추진해야 한다”며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는 22개 코인 마켓 거래소들은 생존 차원에서 관련 이해 당사자들과 사법적 대응 방안을 비롯해 다양한 대응책을 적극적으로 강구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명계좌 발급받은 거래소, 최소 30억 준비금 적립해야
기존 원화거래소도 은행 실명계좌 발급 기준안이 마련되면서 좀 더 강화된 조치가 뒤따르게 됐다.
가상 자산 업계에 따르면, 실명계좌를 발급받은 가상 자산 거래소는 다음 달부터 ‘최소 30억원’ 준비금을 적립해야 한다.
이는 가상 자산 거래소에 실명계좌를 내주는 은행들의 요구사항이다. 은행연합회는 지난달 말 ‘가상 자산 실명 계정 운영지침’을 발표했다.
해킹이나 전산 장애 등 사고 발생 시 이용자들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위한 ‘투자자 보호’ 조치다.
지침에 따르면, 가상 자산 거래소는 일 평균 예치금의 30% 또는 30억원 중 큰 금액을 준비금으로 적립하는 게 의무다. 일 평균 예치금의 30%가 200억원을 초과하는 경우엔 200억원까지만 준비금으로 적립하면 된다.
은행권은 이 밖에도 강화된 고객 확인(EDD‧Enhanced Due Diligence), 추심이체 시 추가 인증 등 여러 기준을 운영지침에 포함했다. 이용자 계좌를 한도 계정과 정상 계정으로 구분해 입출금 한도를 구분하는 방안도 넣었다.
의심 거래 보고 기준도 강화했다. 은행은 실명 계정 입출금이 명확한 경제적‧법적 목적 없이 복잡하거나 규모가 큰 경우 또는 비정상적 형태 등에 해당하면 의심 거래 보고 여부를 검토한다.
은행은 이용자 예치금 보호를 위해 가상 자산 거래소가 이용자 예치금을 별도 예치하거나 신탁하도록 요구하고 월 1회 이상 거래소에 대한 현장실사, 분기별 관리 실태 확인 등을 진행하기로 했다.
한 마디로 은행별로 달랐던 가상 자산 실명 계정 운영 기준이 표준화된다고 보면 된다. AML은 물론 이용자 편의성 확대를 위해서다.
운영지침은 내년 1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준비금 적립’ 사항만 다음 달 우선해서 이뤄진다. 금융당국도 이러한 은행연합회 지침을 반영할 방침이다.
현재 5대 원화거래소는 준비금 적립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이미 은행들로부터 사고 발생 시 문제없도록 준비금을 마련해달라는 요구를 계속 들어온 데다 시행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만큼 발 빠르게 움직였다.
문제는 코인 마켓… 한빛코 이후 원화거래소 진입 막히나?
문제는 코인 마켓 거래소다.
현재 원화거래소보다 몸집이 작고 시장점유율도 모두 합쳐 0.1%에 불과한 22개 코인 마켓 거래소들은 ‘실명계좌’ 확보에 목을 매는 중이다.
지난 6월엔 코인 마켓 거래소 8곳 대표가 모여 만든 대표자 협의체 ‘VXA’가 국내 12개 시중은행과 지방은행, 인터넷은행 등에 원화거래소와 같은 조건에서 실명계좌를 발급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원화 마켓 운영을 할 수 있어야만 고객을 확보할 수 있고 그래야만 거래량이 꾸준히 늘어 수익을 유지할 수 있어서다. 특히 원화거래소 중심으로 형성된 독과점 체제를 깨고 가상 자산 시장이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실명계좌 계약 거래소가 늘어나야 한다는 데 무게를 둔다.
하지만 아직 은행들로부터 어떤 답변도 받지 못한 상태다.
이에 코인 마켓 거래소 사이에선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단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그동안 깜깜이로 진행된 원화 마켓 거래소 수리를 명확히 한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지만, 초안대로라면 코인 마켓 거래소들이 은행으로부터 실명계좌를 받는 게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9월부터 시행되는 준비금 적립 규정은 5대 원화거래소를 대상으로 한다. 그렇기에 코인 마켓 거래소가 당장 서두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앞으로 실명계좌를 발급받아 생존하기 위해선 최소 30억원 이상 준비금이 있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우려가 앞선다.
코인 마켓 거래소의 경우, 2021년 특정 금융 정보법 시행 뒤 원화와 코인 간 거래가 끊기며 거래량이 크게 줄었다. 적자가 지속되는 곳이 대다수다. 30억원이란 준비금 적립 기준이 현재 원화거래소와 똑같이 적용될 경우, 그동안 진행했던 실명계좌 발급 노력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갈 수 있다.
현재 6번째 원화거래소에 가장 가까운 곳은 한빛코(대표 유승재)다. 한빛코는 지난 6월 광주은행(행장 고병일)으로부터 실명계좌를 우선 확보했다. 현재 FIU에 가상 자산 사업자 변경 신고서를 제출해 수리를 기다리고 있다.
프로비트(ProBit‧대표 도현수) 또한 토스뱅크와 실명계좌 발급 약정을 사실상 마무리한 상황이다. FIU가 변경 신고서 제출을 잠시 유보해 달라고 요청해 대기하고 있다.
업계에선 한빛코가 6번째 원화거래소로 진입하더라도 그 이후 7번째부터는 당분간 새로운 진입이 없을 거라고 여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당국이 마련한 지침대로 간다면 업비트뿐 아니라 원화거래소 과점 체제를 눈감아주게 되는 것”이라며 “이는 윤석열닫기윤석열기사 모아보기 정부가 강조해 온 ‘자유시장경제 수호’ ‘이권 카르텔(Kartell‧기업 연합) 척결’이란 국정 방향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업비트 독과점 문제에 대한 회의론적 시각이 많다.
한 원화거래소 관계자는 “업비트가 시장점유율 90%를 차지한 시점에 2위인 빗썸과의 격차도 좁히기 어려운데 새로운 원화거래소가 생긴다고 해서 무슨 소용 있겠냐”며 “코인 마켓 거래소들이 30억원이 없어 원화거래소 진입을 못 하고 결국 수익성 악화로 문을 닫는 일이 늘어나면 그 영향은 결과적으로 업계 전체가 받게 될 것”이라 말했다.
그러면서 “업비트와 실명계좌 제휴를 맺고 있는 케이뱅크(대표 서호성닫기서호성기사 모아보기) 역시 AML 능력이 취약한 것으로 평가받는데도 특별한 문제를 낳지 않고 있다”며 “AML이 심각하게 우려될 상황이라면 업비트부터 원화거래소 지위부터 박탈하는 게 맞지 않냐”고 피력했다.
실제로 시장이 어려운 시기에도 5대 원화거래소 중 업비트 운영사인 두나무만 유일하기 적자를 면했다. 두나무의 올해 2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1866억원, 866억원이다.
다만, 강화된 당국의 기준안을 찬성하는 목소리도 있다. 가상 자산 법 제정 등을 통해 전통 금융 안에 들어오면 당연히 더 규제안이 더 엄격해지는 게 맞단 얘기다.
한 가상 자산 투자자는 “그동안 루나(LUNA) 사태 등 얼마나 많은 투자자 피해 사례가 가상 자산 업계에 있었냐”며 “당국의 강화된 조치가 투자자 보호를 위한 것이라면 규제는 강화되는 게 옳다”고 전했다. 이어 “금융업을 하면서 30억원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덧붙였다.
임지윤 기자 dlawldbs20@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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