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 1992

대한민국 최고 금융경제지

닫기
한국금융신문 facebook 한국금융신문 naverblog 한국금융신문 instagram 한국금융신문 youtube 한국금융신문 newsletter 한국금융신문 threads

호송선단의 종언: 위기가 만든 금융안전망 [김성민의 일본 위기 딥리뷰]

  • kakao share
  • facebook share
  • telegram share
  • twitter share
  • clipboard copy
호송선단의 종언: 위기가 만든 금융안전망 [김성민의 일본 위기 딥리뷰]이미지 확대보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금융시스템의 핵심은 '호송선단'식 보호 체제였다. 가장 느린 선박의 속도에 맞춰 함대 전체가 항해하듯이 대장성(현 재무성)은 금융기관 간 경쟁을 엄격히 통제하고 부실이나 경영 부진으로 시장에서 퇴출되는 은행이 없도록 보호했다. 이러한 체제는 금융기관 간 과도한 경쟁을 억제하는 대신 예금자의 신뢰를 유지하고 기업에 안정적으로 자금을 공급함으로써 자본이 부족했던 고도성장기 일본 경제의 성장 기반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금융자유화와 국제화가 본격화되면서 시장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은행 간 경쟁은 한층 치열해졌지만 호송선단 체제에서 형성된 정부가 은행을 구제할 것이라는 암묵적 기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결과 시장 규율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금융기관들은 위험 관리에 소홀해졌으며 도덕적 해이 속에서 잠재 부실은 금융시스템 내부에 누적되었다.

자산 버블이 붕괴하자 그동안 호송선단 체제에서 가려져 있던 구조적 취약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수년간 부실을 은폐하고 구조조정을 미루면서 잠재되어 있던 위험은 1990년대 후반 전면적인 금융시스템 위기로 현실화되었다. 결국 일본은 관치 중심의 호송선단 체제를 해체하고 시장 규율에 기반한 새로운 금융안전망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호송선단 체제의 종언은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라 혹독한 구조조정의 진통 속에서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한 새로운 제도적 안전망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지연된 손실 인식, 연쇄 도산의 도화선이 되다

1980년대 이후 금융자유화와 국제화가 진전되면서 호송선단식 체제의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0년대 초 자산 버블이 붕괴하자 기존의 보호 체제는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이를 대체할 시장 규율 기반의 새로운 금융안전망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부동산과 주가의 급락으로 대출 자산이 빠르게 부실화되었음에도 이를 투명하게 처리할 제도적 장치가 없자 당국은 과거의 관행적인 행정지도와 임기응변식 대응으로 일관하며 위기 해결을 미루는 데 급급했다.

당시 정책당국은 금융시스템의 신뢰 붕괴를 우려해 부실채권의 조기 정리와 손실 인식을 미루는 대신 비공식적 지원과 관용적인 회계 기준을 통해 금융기관의 부실을 점진적으로 처리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상환 능력이 없는 기업에 대출을 지속적으로 연장해 주는 에버그리닝(Evergreening)이 금융권 전반에 성행했다. 한계 기업에 대한 기존 대출이 부실채권으로 분류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원금 상환을 연장하고 이자 지급에 필요한 자금까지 추가로 빌려주어 부실이 장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그 결과 도산했어야 할 기업들이 퇴출되지 않고 좀비 기업으로 연명하면서 은행도 해당 대출을 정상자산으로 유지해 부실 인식을 장기간 미룰 수 있었다. 이러한 부실 처리의 유예는 금융시스템 본연의 자원 배분 기능을 근본적으로 훼손했으며 일본 경제를 장기 침체의 늪으로 밀어 넣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부실 처리 지연 전략은 1997년 후반을 기점으로 파국을 맞았다. 산요증권의 무담보 콜론 채무불이행으로 금융기관 간 신뢰가 붕괴하면서 단기자금시장이 극도로 경색되었다. 이로 인해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홋카이도 다쿠쇼쿠은행, 일본장기신용은행, 일본채권신용은행 등 대형 금융기관이 잇따라 도산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일본 금융위기가 단순히 개별 금융기관의 부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부실을 조기에 인식하고 정리하며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시스템 리스크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지도 없이 전선에 서다: 최종대부자의 과부하와 딜레마

나카소 히로시 전 일본은행 부총재는 1990년대 일본 금융위기 발생 당시 위기관리를 위한 시스템적 대응 체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지도도 없이 전쟁터에 나간 것”에 비유하며 금융위기 대응 체계의 세 가지 결정적 결함을 지적했다.

첫째는 부실 금융기관을 시장의 충격 없이 퇴출할 법적 프레임워크가 미비했다는 점이다. 자산과 부채를 분리해 신속히 정리할 법적 기반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국은 부실은행을 건전한 은행에 강제로 인수시키는 기존의 방식에 다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예금보험기구의 재원과 조직 역량이 대규모 위기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미흡했다는 점이다. 부실 규모에 비해 기금 자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예금자 보호 기능 조차도 제대로 수행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셋째는 공적자금 투입에 따른 정치적 부담과 사회적 반발이 초기 대응을 지연시켰다는 점이다. "부실 경영을 한 은행에 혈세를 투입할 수 없다"는 사회적 반대 여론으로 인해 정작 필요한 시기에 공적자금을 투입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시스템을 뒷받침할 제도적 안전망이 제 기능을 못 하면서 위기 수습의 모든 부담은 일본은행의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기능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나카소 부총재는 이처럼 공적자금 투입과 부실 정리 작업이 지연된 핵심 원인으로 금융기관과 채권자 등 시장참가자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정책당국의 과도한 우려를 지적했다. 당시 정책당국은 다음 두 가지 쟁점을 두고 깊은 딜레마에 빠졌다.

첫 번째 쟁점은 예금자를 제외한 일반 채권자에 대한 손실 분담(Haircut)의 범위였다. 채권자에게 손실을 부담시키는 것은 원칙적으로 시장 규율을 확립함으로써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위기 한복판에서 이를 강행할 경우 금융시장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광범위한 뱅크런을 초래할 위험이 컸다.

실제로 금융 불안이 극에 달했던 1997~1998년 당시에 채권자 손실 분담을 강행했다면 기관투자자와 대형 예금자의 동시 자금 회수를 자극해 시스템 전체의 유동성 위기를 통제 불능 상태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결국 당국은 채권자의 도덕적 해이를 차단해야 한다는 원칙과 금융시스템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불가피한 선택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딜레마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시티그룹 구제 과정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당시 실라 베어(Sheila Bair) 연방예금보험공사 의장과 팀 가이트너(Tim Geithner)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채권자 손실 부담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베어 의장은 채권자 손실 분담과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시장 규율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본 반면 가이트너 총재는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채권자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맞섰다.

결국 미국 정부는 가이트너의 손을 들어주면서 채권자 전액 보장을 선택했다. 이는 시스템 붕괴를 막는 데는 기여했지만 '대마불사'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그 후 도드-프랭크법과 같은 금융 규제 개혁이 추진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두 번째 쟁점은 전액 보장 조치의 종료 및 정상화 시점이었다. 위기 대응을 위해 한시적으로 도입한 예금·채권 전액 보장을 언제까지 유지하고 어느 시점에 부분 보장 체제로 복귀시킬 것인지가 핵심 과제였다. 이는 금융 안정이라는 단기적 목표와 시장 규율 확립이라는 장기적 목표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점을 찾기 위한 근본적인 정책적 선택이었다.

방파제의 재설계: 4대 금융안전망과 법적 토대의 구축

결국 1997~1998년의 금융기관 연쇄 파산과 신용 경색은 암묵적 보증과 당국의 보호에 의존하던 과거 호송선단 체제가 막을 내리는 전환점이 되었다. 임기응변적 대응이 한계에 이르자 일본 정부는 비로소 예금보험기구의 기능과 재원을 대폭 확충하고 공적자금을 활용한 금융기관의 자본 확충에 나섰다. 대형 금융기관의 연쇄 도산이라는 파국적 충격을 겪고서야 부실 금융기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과거 호송선단 방식을 대체하는 현대적 금융안전망(Financial Safety Net)은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네 가지 핵심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금융감독 및 건전성 규제(Prudential Supervision)이다. 금융기관의 과도한 리스크 추구를 억제하고 재무 건전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사전 예방 장치에 해당한다.

둘째는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기능(Lender of Last Resort)인 데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에 빠진 금융기관에 긴급 자금을 공급해 시장의 패닉과 연쇄 도산을 막는다.

셋째는 예금보험제도(Deposit Insurance System)다. 금융기관이 파산하더라도 예금자의 자금을 일정 한도까지 보호해 뱅크런을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넷째는 부실 금융기관 정리 프레임워크(Resolution Framework)인 데 회생이 불가능한 금융기관을 신속하고 질서 있게 퇴출함으로써 시스템 리스크의 확산을 차단한다.

이 네 가지 요소는 개별 기구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사전 예방 → 유동성 공급 → 예금자 보호 → 시장 혼란 없는 퇴출'이라는 단계별 메커니즘으로 유기적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금융시스템이 안정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금융안전망 개혁의 첫 단추는 감독 체계의 전면 개편이었다. 1998년 6월 출범한 금융감독청(현 금융청)은 대장성으로부터 금융감독 권한을 이관받아 감독체계를 일원화하고 금융기관에 대한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감독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마련했다. 특히 감독 행정의 독립성을 확보하여 대장성 중심의 관치 금융 아래 형성된 감독체계를 개편하고 감독의 객관성과 투명성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금융감독청은 출범 직후 모든 은행을 대상으로 고강도 특별 검사를 단행했고 그 결과 1998년 3월 은행들이 발표한 자산 평가가 실제 부실 규모를 크게 과소평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온정주의적 감독 관행에서 벗어나 금융기관에 대한 엄격한 건전성 감독 체계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엄격한 자산평가와 투명성 강화 조치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입법 측면에서도 근본적인 대전환이 이루어졌다. 1998년 2월 제정된 '금융기능안정화법'은 은행의 자본 확충에 사용할 수 있는 공적자금이 13조 엔(전체 30조 엔 중)에 불과했던 데다 공적자금 투입 요건도 까다로워 은행들의 자본 확충 신청이 저조했다. 그 결과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커졌고 금융시장 신뢰 회복에도 실패했다.

이에 일본 국회는 1998년 10월 이른바 '금융 국회'를 열어 '금융재생법'과 '금융기능 조기건전화법'을 통과시키고 '예금보험법'을 개정했다. 이로써 공적자금 규모가 60조 엔으로 대폭 확대되었고 부실은행을 신속하게 정리할 수 있는 법적 틀과 실효성 있는 공적자금 투입 체계가 비로소 구축되었다.

이러한 법적 토대 위에서 정부는 1998년 4월 '신속시정조치(Prompt Corrective Action)'를 전면 도입했다. 이 제도의 핵심은 BIS 자기자본비율을 기준으로 감독당국이 단계별 시정조치를 의무적으로 발동하도록 한 데 있다. BIS 자기자본비율이 일정 수준 아래로 하락하면 지점 축소와 배당금 지급 제한 등의 경영개선 조치를 명령하고 지급불능 상태에 빠지면 즉시 청산 절차를 밟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다만 제도가 실효성을 거두려면 은행이 부실자산을 충실히 반영한 BIS 자기자본비율을 산출해야 했다. 이에 따라 당국은 은행이 엄격한 기준에 따라 자산 건전성을 스스로 평가하는 '자기평가(self-assessment)'를 의무화하고 그 평가 결과에 대한 감독과 검증을 강화했다. 하지만 국제 영업을 하지 않는 지역은행에는 적용을 1년간 유예하면서 초기부터 온정주의적 예외를 인정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98년 10월 오부치 게이조 내각은 금융재생법과 금융기능조기건전화법을 제정하고 예금보험법을 개정해 총 60조 엔 규모의 공적자금 투입 체계를 법제화했다. 이들 법률은 부실은행의 정리 절차를 제도화하는 한편 자본 확충이 필요한 은행에 대한 지원 및 예금자 보호에 소요되는 공적자금의 규모와 용도를 명확히 규정했다. 이로써 부실 금융기관의 선별적 퇴출부터 건전한 은행의 기능 회복에 이르기까지 금융시스템 안정화를 위한 법적 기반과 공적자금 투입 체계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새로운 금융안전망의 핵심은 예금보험기구의 기능과 재원을 대폭 확충한 데 있었다. 1998년 예금보험법 개정으로 예금보험기구는 단순한 예금자 보호 기관을 넘어 공적자금을 활용한 금융위기 대응과 부실 금융기관 정리를 주도하는 핵심 기구로 재편되었다. 정부는 국채 교부와 정부 보증을 통해 예금보험기구의 재원을 대폭 확충하고 일본은행과 민간 금융기관으로부터 직접 자금을 차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충분한 재원과 강력한 법적 권한을 확보한 예금보험기구는 금융위기 수습과 대규모 구조조정을 수행하는 핵심 실행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1998년 10월 제정된 '금융재생법'에 따라 그해 12월 내각 총리부 산하 독립기구인 금융재생위원회가 출범했다. 이 위원회는 금융기관의 건전성 평가부터 영업정지·국유화 결정, 감독기관 지휘에 이르기까지 기존 대장성 등에 흩어져 있던 위기 관리 권한을 하나로 통합했다. 이로써 일본은 부실 금융기관 정리를 전담하는 독립적인 중앙기구를 처음으로 갖추게 되었다.

부실의 늪을 건너: '호송선단'에서 시장 규율로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과 자본 확충에도 불구하고 은행권의 부실채권 정리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시장 규율에 따른 '질서 있는 퇴출'이 신속하게 이행되지 못한 데에는 세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첫째, 자산 가격의 끝없는 추락이다. 1985년부터 5년간 네 배 폭등했던 도시 상업용지 가격은 1991년 버블 붕괴 이후 1999년까지 약 80% 폭락했다. 담보 가치가 수년간 계속 하락하면서 기존 부실채권을 상각하더라도 새로운 부실이 계속 발생하는 '부실의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둘째, 부실채권을 처리할 시장 인프라의 부재이다. 부실화된 부동산 대출을 증권화하여 시장 매각으로 털어낼 제도적 기반이 초기에는 전무했다. 특수목적법인(Special Purpose Company, SPC) 관련 법안 등 증권화의 제도적 기반이 1998년에야 마련되면서 그전까지는 부실채권을 유동화하거나 시장에 매각할 방법이 사실상 없었다. 그 결과 은행들은 부실채권을 장부에 계속 보유할 수밖에 없었다.

장기화된 초저금리 기조는 은행이 부실채권을 장부에 계속 보유하는 데 따른 비용을 낮춰주었다. 그 결과 손실을 즉시 확정하고 부실채권을 장부에서 제거하기보다 낮은 자금조달 비용에 기대어 보유를 지속했고 자산 가격이 언젠가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와 인프라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부실채권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장 인프라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정부는 정리회수은행과 주택금융채권관리기구를 통합해 1999년 새로운 부실채권 정리기관인 정리회수기구를 출범시켰다. 정리회수기구는 파산한 금융기관의 자산 정리뿐만 아니라 정상 영업 중인 은행의 부실채권까지 매입할 수 있도록 권한이 확대되면서 부실 처리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이와 함께 특수목적법인(SPC)을 활용해 부실대출을 증권화하여 시장에 매각할 수 있는 법적 기반도 완성되었다.

이러한 인프라 구축은 일본 금융정책의 역사적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했다. 모든 은행의 생존을 무조건 보장하던 호송선단식 보호에서 벗어나 회생 가능성이 없는 금융기관은 질서 있게 퇴출시키되 금융시스템 전체의 붕괴는 막는 시장 규율 기반의 안전망으로 체질을 바꾼 것이다. 호송선단 체제가 모든 금융기관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새로운 금융안전망은 금융시스템은 지키되 회생 가능성이 없는 금융기관은 시장 규율에 따라 퇴출시킨다는 원칙을 제도화했다.

하지만 이처럼 금융 시스템 전반을 아우르는 제도 개혁에도 불구하고 부실채권 정리와 금융시스템의 정상화는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1999년 이후 이어진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과 은행의 자본 확충은 시스템의 즉각적인 붕괴를 막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위기의 근본 원인을 뿌리 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국과 은행권은 조기 정상화에 대한 낙관론에 기대어 손실 확정과 구조조정의 속도를 늦췄고 결국 금융시스템의 완전한 정상화는 이후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금융안전망의 완성 조건: 자본 투입보다 중요한 구조조정

일본의 경험은 금융 안정이 단순한 보호 정책이나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1990년대 후반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해 은행의 자본을 확충했지만 부실채권을 상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손실로 자본이 또다시 급격히 잠식되었다.

이에 은행들은 부족해진 자본을 확충하고자 손실 흡수력이 없는 이연법인세자산을 대거 자기자본에 산입했고 그 결과 BIS 자기자본비율은 높게 유지되었지만 실질적인 손실흡수 능력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부실을 근본적으로 정리하지 않은 채 회계적 착시에 의존해 유지된 이러한 자본 구조는 언제든 다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의 시한폭탄과 다름없었다.

실제로 2002년 3월 말 기준 일본 시중은행들의 자산 대비 기본자본비율(Tier 1 Ratio)은 4.0% 수준까지 떨어졌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기본자본의 상당 부분이 실제 위기 상황에서 손실을 흡수할 수 없는 자산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기본자본의 약 35%(10조 6천억 엔)를 차지한 이연법인세자산은 향후 5년 이내 과세소득이 발생해야만 자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부 자산이었다.

하지만 수익성이 크게 악화된 은행들에는 이러한 과세소득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 손실을 흡수하는 자본으로 기능하기 어려웠다. 결국 겉으로는 양호한 기본자본비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상당 부분이 미래 수익 발생을 전제로 한 이연법인세자산에 의존하고 있어 실제 손실흡수 능력은 제한적이었다. 이는 일본 금융시스템을 다시 한 번 위기의 문턱으로 몰아넣는 요인이 되었다.

물론 1998~1999년 공적자금을 투입할 당시 당국이 은행에 강도 높은 부실채권 정리를 즉각 요구하지 못한 것은 신용경색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만약 자본 확충과 동시에 대규모 손실 인식을 요구했다면 투입된 공적자금은 부실채권 상각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을 메우는 데 대부분 소진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은행의 자본과 대출 여력이 다시 위축되면서 실물경제의 신용경색은 더욱 심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부실 처리의 유예는 금융위기를 장기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책당국은 2000년대 초 다케나카 헤이조 금융담당상을 중심으로 '금융재생프로그램'을 추진하며 정책 기조를 전면적인 구조조정으로 전환했다. 정책당국은 은행들에 부실채권을 조기에 정리하도록 요구하고 이연법인세자산의 자기자본 인정 요건을 대폭 강화함으로써 은행의 자본 건전성을 엄격하게 재평가했다. 이러한 조치로 은행들이 부실채권 정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면서 일본 금융시스템은 장기간의 침체에서 점차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일본의 경험이 주는 시사점은 명확하다. 금융안전망은 위기가 발생했을 때 단순히 공적자금을 투입해 금융기관을 연명시키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자본 확충은 투명한 손실 인식과 과감한 구조조정 그리고 시장 규율의 확립과 함께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금융시스템의 건전성을 회복할 수 있다. 반대로 대출 여력 유지를 명분으로 부실 정리를 미루거나 느슨한 회계 기준에 의존해 자본 건전성을 과대평가하면 결국 자금 투입 지연에 따른 더 큰 규모의 공적자금 소요와 장기 침체라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것이 호송선단 체제의 붕괴 과정에서 일본이 남긴 가장 값비싼 교훈이자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금융개혁의 원칙이다.

김성민 교수(전.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교수)

데일리 금융경제뉴스 Copyright ⓒ 한국금융신문 & FNTIMES.com

저작권법에 의거 상업적 목적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 금지

가장 핫한 경제 소식! 한국금융신문의 ‘추천뉴스’를 받아보세요~

issue
issue

오피니언 BEST CL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