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경제정책 영역 역시 다르지 않다. 위기 국면에서 필요한 결단이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지연될 때 미뤄진 시간만큼 그 대가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일본의 버블 붕괴 이후 전개된 불황은 단순한 경기순환 국면의 불경기가 아니었다. 전후 고도성장을 떠받쳐 온 일본식 금융·산업 시스템이 뿌리째 흔들린 구조적 파국이었다. 자산 가격의 급락은 단순한 시장 침체에 머물지 않았다. 대장성의 비호 아래 안주하던 금융기관들이 부실을 감추고 미봉책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에 서서히 불어난 부실채권은 조만간 시스템 전체를 동반 침몰시킬 파멸의 도화선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잡은 것은 정치였다. 정치권은 “부실 은행을 왜 국민들의 혈세로 구제해야 하느냐”는 여론의 반발을 우려했고 관료 조직 역시 자신들이 구축해 온 이른바 ‘호송선단식’ 금융 시스템의 실패를 쉽게 인정하지 못했다. 그 결과 정부와 금융당국은 과감한 구조조정보다 부실을 덮고 뒤로 미루는 방식을 택했고 이는 채무 상환 능력을 상실한 기업들에 대한 대출 연장과 회계상 손실 유예가 관행처럼 되풀이되는 결과를 낳았다.
문제는 이러한 지연이 위기 해결을 위한 구조조정 비용을 오히려 기하급수적으로 키웠다는 점이다. 장부 뒤에 은폐된 부실채권은 금융 시스템의 자금 중개 기능을 약화시켰고 은행들은 새로운 성장 산업보다 기존의 부실 기업을 연명시키는 데 자금을 쏟아붓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그 사이 경제가 짊어져야 할 최종 청구서의 무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고 경제는 성장 동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장기 침체와 디플레이션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1990년대 일본의 경험은 경제위기에서 정치적 결단의 지연이 국가의 성장 잠재력을 치명적으로 훼손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반면교사다.
관련기사
첫째, 성장 정체기에도 '고통 분담'을 위한 이해관계 조율을 회피한 정치권의 태도다. 1980년대까지 일본 정치는 고도성장에 따른 세수 증가분을 각 이해집단에 배분하는 방식으로 지지 기반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버블 붕괴 이후 경제가 저성장과 자산 디플레이션 국면에 접어들면서 정치는 더 이상 ‘이익의 배분’이 아니라 ‘고통의 분담’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부실기업 정리와 금융 구조조정이 필연적으로 동반할 실업 증가와 자산 가치 하락은 선거를 의식하는 정치권에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에게 유권자의 직접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정책은 사실상 선택지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치는 근본적인 구조조정보다 단기적 충격을 완화하는 미봉책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특히 1995년 주센 처리 과정에서 거센 국민적 반발을 경험하면서 금융 시스템 안정화를 위한 공적자금 투입과 구조조정은 정치권의 가장 취약한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결국 정치권은 과감한 부실 정리 대신 경기 회복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앞세워 손실 처리를 미루는 안이한 길을 택했고 당장 표심을 이탈시킬 위험이 큰 고통 분담 정책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났다.
둘째는 정치개혁의 역설이다. 1994년 오자와 이치로 주도로 추진된 정치개혁은 정책 결정의 전권을 쥐고 흔들던 엘리트 관료 체제를 견제하고 선거로 선출된 정치권이 국정을 직접 이끄는 ‘정치 주도’의 책임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핵심은 소선거구제 도입이었다. 기존 중선거구제는 같은 당 후보끼리 경쟁하는 구조 속에서 파벌 정치와 정치자금 중심의 개인 후원 정치를 강화하고 자민당 장기 집권 체제를 고착시킨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소선거구제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낳았다. 선거 결과가 소수의 부동층 표심에 좌우되면서 정치인들은 국가의 중장기 과제보다 단기적 여론 변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구조조정처럼 단기적 고통을 수반하는 정책은 정치적으로 회피 대상이 되었고 대신 즉각적인 경기부양책과 임기응변식 대응이 선호되었다. 책임 정치를 강화하려던 제도 개혁이 역설적으로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단기 포퓰리즘적 대응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정치가 정책 결정의 전면에 나설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전후 일본의 경제 운영은 대장성과 일본은행 같은 관료조직이 주도하고 정치인은 예산 확보와 이해관계 조정을 담당하는 분업 구조 위에서 이루어져 왔다. 자민당 중진 가토 고이치의 회고처럼 당시 정치권 내부에는 “거시경제 해법은 관료가 마련한다”는 암묵적 인식이 강했다. 정치인들은 경제 운영의 최종 책임자라기보다 관료가 설계한 정책을 사후적으로 조정하는 역할에 익숙해져 있었고 장기 불황과 금융위기처럼 대규모 구조조정과 사회적 비용 분담이 요구되는 상황에 대한 경험도 부족했다.
더욱이 버블 붕괴 이후에는 기존 관료 시스템 역시 과거와 같은 권위와 정책 주도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금융행정 실패와 잇따른 스캔들은 대장성과 일본은행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고 정치권이 정책 결정 과정의 전면에 나서자 관료 조직 내부에서는 과감한 정책 추진보다 정치권의 눈치를 보며 엎드려 지내는 소위 ‘복지부동’의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과거처럼 관료가 강한 권위로 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워진 반면 정치권 역시 이를 대체할 성숙한 정책적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 결과 아무도 결정의 책임을 지지 않는 ‘이중의 리더십 공백’이 도래했다. 경제적 합리성에 기반한 신속한 위기 대응은 정치권의 표 계산과 관료 조직의 안일한 보신주의 사이에서 번번이 좌초되었다. 그렇게 위기가 방치되는 사이 금융 시스템의 부실채권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디플레이션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셋째는 정권의 취약성이 책임 회피 구조를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1993년 자민당의 장기 집권 체제가 흔들린 이후 일본 정치는 연립정권의 이합집산과 잦은 총리 교체 속에서 만성적 리더십 불안정 상태에 들어갔다. 실제로 1990년대 일본 총리들의 재임 기간은 대부분 1~2년에 불과했다. 정권의 수명이 짧아질수록 구조개혁의 유인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개혁의 고통은 현 정권이 감당해야 하지만 성과는 미래의 정권이 가져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권 내부에는 “내 임기 동안만 위기가 표면화되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단기주의적 책임 회피가 확산되었다.
결단력을 상실하고 파벌 정치의 늪에 빠진 정치권이 선택한 가장 손쉬운 대응은 선심성 공공사업 위주의 방만한 재정지출이었다. 민간 소비와 투자가 위축된 상황에서 공공사업 확대는 단기 경기 부양과 지역구 관리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당 부분의 재정지출이 생산성 향상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배분되었고 이는 구조개혁을 지연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1990년대 일본의 재정정책은 금융 시스템과 산업 구조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위기의 표면화를 늦추는 임시 처방으로 기능했고 그 결과 개혁 지연과 국가 채무의 누적이라는 악순환이 심화되었다. 위기를 해결해야 할 정치가 오히려 위기를 장기화시키는 구조적 모순에 빠진 것이다.
비극의 시작은 역설적으로 일본이 수면 아래의 부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감에 도취해 있던 시점이었다. 1990년대 초 도쿄 마루노우치의 금융가는 여전히 번영의 상징처럼 보였다. 일본 은행들은 세계 자산 순위 상위권을 휩쓸었고 일본식 경영은 세계적 성공 모델로 찬사를 받고 있었다. 화려한 외형을 자랑하던 금융 시스템의 내부는 이미 버블 붕괴에 따른 부실채권 누적으로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경제 논리에 기반한 대응 방향은 비교적 명확했다. 손실을 조기에 인정하고 부실채권을 신속히 정리한 뒤 공적자금을 투입해 금융 시스템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공법은 이해집단의 표 계산이 얽힌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작동하지 않았다.
위기 초기 정치권과 관료 조직의 상황 인식은 지나치게 안일했다. 1991년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대장상은 “일본 금융기관의 파산으로 예금자가 피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정부가 금융 시스템 전체를 보호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는 전후 일본 금융행정을 지탱해온 이른바 ‘단 한 곳의 은행도 망하게 하지 않는다’는 호송선단 방식에 대한 맹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메시지가 금융기관의 자발적 구조조정 유인을 약화시켰다는 점이다. 은행들은 손실을 조기에 드러내기보다 정부 지원에 기대어 시간을 벌려 했고 정치권 역시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데 부담을 느꼈다. 금융시스템의 외형적 안정이 우선시되면서 부실의 표면화와 손실 확정은 점점 뒤로 미뤄지기 시작했다.
1992년은 사태 악화를 조기에 차단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골든타임이었다.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는 버블 붕괴 이후 처음으로 공적자금 투입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 구상은 곧 거센 정치적 반발에 부딪혔다. “왜 국민 세금으로 은행의 실패를 떠안아야 하느냐”는 여론이 확산되자 정치권은 구조조정의 정치적 비용을 감당하기보다 회피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정부는 공적자금을 통한 과감한 정리 대신 은행의 자구 노력과 자산 가격 반등에 기대를 거는 소극적 대응으로 후퇴했다. 이때의 결정적 기회 상실은 이후 6년 가까이 이어진 결단 유예와 ‘지연된 정의’의 서막이 되었다.
당시 정책 당국의 가장 큰 오판은 부실채권 문제를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이 아니라 일시적 경기 침체의 부산물로 인식한 데 있었다. 1992~1993년 일본 정부의 경제백서 역시 부실 규모가 관리 가능한 수준이며 금융기관의 건전성도 유지되고 있다는 지나치게 안일한 평가를 내놓았다. 자산 가격이 반등하면 부실의 상당 부분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정책 판단을 지배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자산 가격 하락은 멈추지 않았고 경기 침체 역시 장기화되었다. 그 사이 은행들은 부실기업의 대출 만기를 반복적으로 연장해주는 이른바 ‘에버그리닝’에 의존했다. 원래 시장에서 퇴출되어야 할 기업들은 연명했고 금융기관의 자금은 생산성이 높은 부문으로 이동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일본 경제에는 수익성 없이 생존만 유지하는 ‘좀비기업’이 시간이 갈수록 누적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문제를 조기에 매듭짓지 못한 대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위기의 본질을 직시하기보다 시간을 벌려 했던 초기 대응은 이후 일본 금융위기의 전개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1995년은 일본 금융위기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1995년은 일본 금융위기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주가 폭락에 이어 부동산 가격 하락까지 장기화되면서 금융권 부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고 그해 표면화된 주센 사태는 일본 금융 시스템 내부에 누적되어 있던 위험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주센은 원래 주택담보대출 확대를 위해 설립된 금융기관이었지만 버블 경제가 정점으로 치닫던 시기 무분별한 부동산 개발 대출에 뛰어들며 투기 자금의 통로로 변질되었다. 이후 버블 붕괴로 담보 가치가 폭락하자 상당수의 주센은 사실상 정상적인 영업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 이는 단순한 개별 금융기관의 실패가 아니라 당시 일본 금융 시스템 전체가 구조적 부실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995년 말 일본 정부는 주센 정리를 위해 약 6,850억 엔 규모의 공적자금 투입을 결정했다. 경제적으로는 금융시스템 불안을 차단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에 가까웠지만 정치적으로는 거센 역풍을 불러왔다. 야당과 언론은 “왜 민간 금융기관의 실패를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하느냐”며 반발했고 공적자금 투입 문제는 순식간에 정치권의 최대 쟁점으로 비화했다. 특히 자민당의 거대 표밭인 농협과 정치권의 결탁 구조와 이들의 손실을 세금으로 메워주려는 특혜 행정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겹치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역시 공적자금 투입에 대한 국민적 설득과 이해를 구하기보다 원칙을 저버린 특정 이해집단 특혜 구제안에 쏟아지는 비판을 변명하고 당장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는 데 급급했다.
문제는 주센 사태가 단순한 일회성 정치 논란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정 이해집단을 구제하기 위해 명분 없이 공적자금을 오용한 대가는 혹독했다. 이 사건 이후 일본 정치권 내부에는 공적자금 투입 자체를 극도로 부담스러운 정치 행위이자 ‘정치적 실책에 대한 해명과 사과’의 영역으로 인식하는 강력한 트라우마가 자리 잡았다. 금융 시스템 안정을 위한 선제적 개입이라는 정책 본연의 의미는 완전히 변질되고 말았다. 그
결과 정치권은 금융기관 자본 확충과 부실 정리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자신들이 자초한 여론의 역풍을 우려해 과감한 결단을 반복적으로 미루게 되었다.
이처럼 정책 결정이 주저하는 사이 은행들은 부실을 조기에 정리하기보다 시간을 벌며 연명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부실기업에 대한 대출 만기 연장과 손실 이연이 반복되었고 금융 시스템 내부에는 이미 회수가 불가능한 악성 자산들이 누적적으로 불어났다. 표면적으로는 금융 시스템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부실이 장부 뒤로 계속 쌓여 가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주센 사태는 일본 정치가 금융위기의 근본적인 해법을 찾기보다, 정권이 짊어질 비판을 피하기 위해 부실을 미봉책으로 덮고 넘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위기의 징후가 뚜렷해진 이후에도 일본은 근본적 해결보다 문제의 표면화를 늦추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고 그 지연의 대가는 결국 1997~1998년 금융위기 국면에서 훨씬 더 큰 충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지연된 구조조정의 대가는 결국 1997년 가을 대형 금융기관들의 연쇄 파산이라는 형태로 폭발했다. 산요증권의 파산을 시작으로 전후 최초의 도시은행 파산인 홋카이도 다쿠쇼쿠은행 그리고 일본 4대 증권사 가운데 하나였던 야마이치증권이 잇달아 무너졌다. 이는 단순한 개별 금융기관의 실패가 아니었다. 전후 일본 금융 시스템이 더 이상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시장의 반응은 냉혹했다. 투자자들은 더 이상 개별 금융기관의 건전성만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일본 금융 시스템 전체의 안정성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외 금융시장에서 일본 금융기관들이 자금을 조달할 때 추가로 부담해야 했던 이른바 ‘재팬 프리미엄’은 급등했고 일본 은행들의 해외 자금 조달 비용도 빠르게 상승했다. 이는 일본 금융시스템 전체에 대한 국제금융시장의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신호였다.
1998년 들어 위기는 금융권을 넘어 실물경제 전반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금융기관들은 자산 건전성 악화를 우려해 대출을 축소했고 기업들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금융 시스템 불안이 신용경색으로 이어지면서 정치권 역시 더 이상 시간을 벌기만으로는 위기를 막을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그러나 정작 정치권 내부에서는 위기 대응 방식을 둘러싸고 정국을 마비시킬 만큼 극심한 노선 갈등이 이어졌다. 자민당은 금융 시스템의 전면적 붕괴를 막기 위해 일단 은행 기능을 유지하고 시장 불안을 진정시키는 것을 그 무엇보다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반면 야당은 공적자금 투입에 앞서 경영진과 주주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부실 금융기관 정리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쟁점은 단순한 구제 여부가 아니었다. 누구에게 손실 부담을 지우고 어떤 방식으로 금융 시스템을 재건할 것인가를 둘러싼 치열한 이해관계의 충돌이자 위기 해법을 둘러싼 정면 대립이었다.
결국 교착 상태를 끝낸 것은 정치가 아니라 시장이었다. 일본장기신용은행의 경영 불안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되고 금융시스템 전반의 신뢰 위기가 심화되자 정치권은 비로소 더 이상의 지연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금융시스템 붕괴가 실물경제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다는 공포가 정치적 계산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8년 10월 일본 국회는 금융재생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부실 금융기관을 정부가 직접 관리·정리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했고 필요할 경우 국유화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이는 전후 일본 호송선단식 금융행정의 근간이었던 이른바 ‘은행 불패’의 신화가 사실상 폐기되었음을 의미하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다시 전면에 등장한 인물은 미야자와 기이치였다. 1992년 그가 공적자금 투입과 조기 부실 정리의 필요성을 제기했을 때 일본 정치는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이를 외면했다. 그러나 위기가 시스템 전체를 뒤흔드는 단계에 이르자 정치권은 결국 그가 과거 제시했던 방향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6년 만에 대장상으로 복귀한 미야자와는 일본장기신용은행과 일본채권신용은행의 국유화를 주도하며 금융 시스템 안정화에 나섰다. 이는 단순한 금융기관 정리를 넘어 오랫동안 미뤄져 온 손실의 투명한 공개와 구조조정을 뒤늦게나마 제도적으로 안착시킨 역사적 이정표였다. 결국 일본 정치권은 시장 압력이 금융 시스템 전체를 붕괴 직전까지 몰아간 이후에야 비로소 초기에 외면했던 부실의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 셈이었다.
일본 정치권은 결국 결단을 내렸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1992년 상대적으로 제한된 비용으로 수습할 수 있었던 금융 부실은 6년의 지연 끝에 약 60조 엔 규모의 공적자금 투입이 필요한 국가적 위기로 확대되었다. 정치가 선거와 여론을 의식하며 결정을 미루는 사이에 부실은 금융 시스템 내부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그 청구서는 결국 국민의 세금 부담과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 훼손이라는 형태로 되돌아왔다.
금융위기 대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초기에는 관리 가능한 수준이었던 부실 규모도 처리 시기를 놓치는 순간 금융시스템 전체의 기능 마비로 번진다. 1990년대 초반 일본은 아직 위기를 통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권은 구조조정의 필요성과 불가피성을 국민에게 설득하기보다 여론의 반발을 우려해 문제를 뒤로 미루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은행들은 부실기업에 대한 대출 만기를 연장하는 이른바 ‘에버그리닝’에 의존했고 시장에서 퇴출되어야 할 ‘좀비기업’들이 연명하는 동안 자금은 생산성이 높은 부문으로 이동하지 못했다. 문제를 유예하는 동안 부실은 사라지지 않았고 일본 경제는 결국 장기 침체와 디플레이션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자산 가격 급락이라는 충격이 장기 침체로 고착화된 배경에는 정치권과 금융 당국이 부실 자산을 조기에 투명하게 공개하고 정리하기보다 시간을 벌며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리는 선택을 반복한 구조적 실패가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를 지배했던 것은 “경기가 회복되면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근거없는 낙관론이었다. 그러나 부실 정리를 미루고 구조조정의 결단을 지연시킨 대가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처리되지 않은 부실은 금융 시스템 내부에서 계속 누적되었고 그 부담은 결국 국가부채 증가와 성장 잠재력 훼손이라는 형태로 미래 세대에 전가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연된 정의의 경제학’이 남긴 가장 냉혹한 교훈이다.
이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선거 주기는 짧지만 구조개혁의 성과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 나타난다. 그 때문에 정치인은 당장의 비난과 표심 이탈을 초래할 수 있는 결정을 본능적으로 회피하려는 유인을 갖게 된다. 그러나 위기 국면에서 정치의 역할은 눈앞의 고통을 단순히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더 큰 재앙을 막기 위해 선제적으로 비용을 감당하는 데 있다. 때로는 단기적인 지지율 하락을
감내하더라도 구조적 문제를 조기에 처리하는 결단이야말로 가장 책임 있는 정치의 본질이다.
시장은 위기의 경고음을 끊임없이 울릴 수는 있지만 그 위기를 정면으로 처리할지 아니면 시간을 벌며 미룰지는 결국 정치의 몫이다. 일본의 경험은 경제위기에서 가장 큰 비용이 잘못된 결정이 아니라 결정을 미루는 데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지연된 구조조정은 결국 더 큰 비용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이는 더 거대한 청구서를 미래 세대로 떠넘기는 정치적 무책임의 극치일 뿐이다.
김성민 교수(전.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교수)
데일리 금융경제뉴스 Copyright ⓒ 한국금융신문 & FNTIMES.com
저작권법에 의거 상업적 목적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 금지
가장 핫한 경제 소식! 한국금융신문의 ‘추천뉴스’를 받아보세요~









![정치가 경제를 인질로 삼을 때: 1990년대 일본 금융위기와 '지연된 정의' [김성민의 일본 위기 딥리뷰]](https://cfn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5031321473103554c1c16452b012411124362.jpg&nmt=18)


![[김의석의 단상] 신한의 야성을 깨우는 진옥동의 '부스트업'](https://cfnimage.commutil.kr/phpwas/restmb_setimgmake.php?pp=006&w=110&h=79&m=5&simg=20260716181109089530c1c16452b012411124362.jpg&nmt=18)
![메타엑스(MetaX)의 5년 질주…AMD 출신 3인, 엔비디아에 도전장을 내밀다 [전병서의 中 첨단기업 리포트⑫]](https://cfnimage.commutil.kr/phpwas/restmb_setimgmake.php?pp=006&w=110&h=79&m=5&simg=20260716162926010120c1c16452b012411124362.jpg&nmt=18)

![자기 지능을 가진 나라와 못 가진 나라, '초격차'가 시작되다 [전명산의 AI블록체인도시 이야기⑮]](https://cfnimage.commutil.kr/phpwas/restmb_setimgmake.php?pp=006&w=110&h=79&m=5&simg=20260420152905003820c1c16452b012411124362.jpg&nmt=18)
![[기자수첩] 가격은 바꿔도 가치는 바꿀 수 없다](https://cfnimage.commutil.kr/phpwas/restmb_setimgmake.php?pp=006&w=110&h=79&m=5&simg=20260715115953057570923defd0cc175195172242.jpg&nmt=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