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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길 벼랑에 글자를 새긴 변호사 - 비런테크(壁仞科技)의 도박 [전병서의 中 첨단기업 리포트⑪]

기사입력 : 2026-06-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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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 새긴 이름, 율법서를 던진 변호사

회사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비런(壁仞)이라는 이름은 중국 우이산(武夷山)의 유명한 암벽 각자 '벽립만인(壁立萬仞)'에서 따왔다. 만 길 벼랑처럼 우뚝 서겠다는 야심을 사명에 박아 넣은 것이다. 그런데 이 회사를 만든 사람은 정작 칩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장원(張文)은 하버드 로스쿨에서 법학박사를 받고, 컬럼비아대 MBA를 거쳐, 월가의 최상위 로펌 커클랜드앤엘리스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인수합병과 사모펀드를 다루던 변호사가 어느 날 GPU 칩을 만들겠다고 나선 셈이다.

그의 이력은 더 화려하게 꼬여 있다. 사모펀드 대표를 거쳐, 중국 반도체의 대부로 불리는 장루징과 함께 LED 칩 회사를 차려 수율을 70%에서 95%로 끌어올렸고, 이후 상탕커지(商汤科技)의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019년 9월, 상탕을 떠나 비런테크를 세웠다.

GPU 기술자 출신이 아닌 사람이 GPU 회사를 만든다는 것은 당시 업계에서 거의 농담거리였다. 장원 본인도 이를 자조하며 자신을 가리켜 중국 제1의 헤드헌터라 불렀다.

실제로 그는 하버드 동문에게 전세계 최고의 칩 기술자 명단을 뽑아오게 한 뒤, 직접 한 명씩 찾아가 영입했다. 화웨이 하이실리콘 GPU 수석 아키텍트였던 훙저우를 비롯해 엔비디아, AMD, 삼성, IBM, 오라클 출신 인재들이 이렇게 모여 드림팀이 꾸려졌다. 변호사가 기술을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는 데 모든 것을 걸었다는 뜻이다.

비런테크 창립자 장원 회장이미지 확대보기
비런테크 창립자 장원 회장

A100을 베끼려다 제재를 맞고, 칩을 둘로 쪼개 다시 일어섰다

비런테크의 역사는 한 편의 좌절과 재기의 드라마다. 2022년 8월, 회사는 엔비디아 A100의 3배 연산력을 내세운 BR100을 발표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런데 두 달 만에 미국이 새 수출통제 규정(ECCN 3A090)을 발표하면서 BR100의 사양이 바로 그 규제선에 걸려버렸다. 이후 대만 TSMC의 위탁생산 통로까지 막히면서 BR100은 사실상 사산됐고, 핵심 공동창업자들이 줄줄이 회사를 떠났다.

회사가 다시 일어선 방법은 영리했다. 규제를 피해 사양을 낮춘 BR106을 2023년 양산했고, 2025년에는 칩렛(Chiplet) 기술로 BR106 다이 두 개를 하나의 패키지에 묶어 성능을 두 배로 끌어올린 BR166을 내놓았다. 즉 지금 매출의 주력인 BR166은 사실 2022년에 개발된 BR100 아키텍처의 재탕이라는 것이 업계의 냉정한 평가다.

네이티브 FP8과 FP4를 지원하지 못하고, 메모리와 연결 성능에서 이미 경쟁사들에게 따라잡혔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래서 BR166은 주로 국가 주권 AI 프로젝트에만 공급되고 있고, 아직 대형 인터넷 기업의 대규모 주문은 받지 못한 상태다. 다음 세대 주력 모델인 BR20X는 원래 2026년 상반기 상용화를 목표로 했으나 2026년 4분기로 일정이 늦춰졌고, 핵심 관문은 새 생산라인의 수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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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 63억 위안, 그래도 주가는 첫날 82% 뛰었다

2026년 1월 2일, 비런테크는 홍콩거래소에 상장하며 “홍콩증시 GPU 1호”주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공모가 19.60홍콩달러로 시작해 개장 직후 82% 폭등했고, 장중에는 110%까지 치솟으며 시가총액이 한때 1000억 홍콩달러를 넘었다. 공모 청약 경쟁률은 2347배에 달했다.

그런데 이 화려한 데뷔의 뒤편에는 누적 63억 위안이 넘는 적자가 깔려 있다. 2025년 매출은 10억3500만 위안으로 전년 대비 207% 늘었고 매출총이익률도 53.8%까지 개선됐지만, 연구개발비가 매출의 142.6%에 달할 만큼 여전히 돈을 쏟아붓는 단계다.

고객 구조도 흥미롭다. 2023년에는 상위 5개 고객이 매출의 98.1%를 차지했고 최대 고객 한 곳이 85.7%를 가져갔다. 2025년 상반기 들어 상위 5개 고객 비중이 71.3%로 낮아졌지만, 여전히 특정 고객 의존도가 매우 높다.
매출의 99% 이상이 사실상 단일 사업, 즉 스마트 컴퓨팅 솔루션에서 나온다는 점도 약점이다.

그럼에도 시장이 이 회사에 베팅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 중국의 AI 칩 시장은 수요가 공급의 거의 1.6배에 달하는 극심한 부족 상태이고, 만들어 내놓을 수 있는 회사가 곧 주문을 받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홍콩 증시 GPU 제1호 기업으로 꼽히는 비런테크가 기업공개를 했다.이미지 확대보기
홍콩 증시 GPU 제1호 기업으로 꼽히는 비런테크가 기업공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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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재가 만든 회사, 제재가 키운 회사

비런테크의 운명은 미국의 수출통제와 묶여 돌아간다. 2023년 10월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 실체리스트에 오르며 TSMC 위탁생산 통로가 끊겼고, 핵심 인력 이탈이라는 후폭풍도 맞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2025년 엔비디아 H20 수출이 막히자, 중국 클라우드 대기업들의 예산이 강제로 국산 칩 쪽으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바이트댄스가 2026년 국산 AI 칩 구매 계획을 400억 위안 이상으로 늘렸다는 소식이 대표적이다. 즉 제재가 비런테크를 죽이려 했지만, 더 강한 제재가 역설적으로 비런테크의 시장을 만들어준 셈이다.

지금 비런테크가 누리는 또 하나의 보호막은 생산능력 배급제다. 중국의 첨단 공정 생산능력은 시장가격이 아니라 전략적 배분으로 돌아가는데, 상하이가 키운 토종 기업이자 화훙반도체가 주주로 들어와 있는 비런테크는 이미 생산 진입 자격을 확보했고, 화훙의 7나노 라인이 본격화되면 추가 공급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다만 화훙의 7나노 공정은 아직 DUV 다중노광 방식으로 수율과 에너지효율이 낮은 초기 양산 단계여서, 단기 출하량의 핵심 제약은 여전히 이 수율 문제로 남아있다.

소프트웨어 생태계, 칼은 만들었는데 칼집이 없다

비런테크의 진짜 약점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그 위에 얹는 소프트웨어다. 자체 개발한 BIRENSUPA 플랫폼의 사용자 수는 엔비디아 CUDA 생태계의 1%에도 못 미치고, 컴파일러와 디버깅 도구 같은 툴체인의 완성도도 낮다.

경쟁사인 하이광신시(海光信息)가 AMD의 오픈소스 ROCm 생태계를 그대로 활용해 이전 비용을 낮추는 전략을 쓰는 데 비해, 비런테크는 자체 폐쇄형 생태계를 고집하다가 결국 주류 오픈소스 프레임워크와의 호환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좋은 칼을 만들었지만 그 칼을 꽂아둘 칼집과 그 칼을 쓰는 법을 가르치는 사범 학교가 아직 부족하다는 뜻이다.

시스템 통합 역량에서도 비런테크는 GPU 자체만 책임지고, 연결과 스위칭, 완제품 통합은 모두 제3자와 협력하는 구조다. 이는 국내 동종업체 대부분과 똑같은 처지로, 시스템 레벨에서 차별화된 우위를 아직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의미다.

결국 비런테크의 핵심 경쟁력은 초창기에 쌓은 단일 칩 설계 역량인데, 추론 시대로 넘어가면서 메모리와 연결성의 중요도가 더 커지고 있어 이 강점의 무게감 자체가 줄어드는 흐름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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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런테크가 한국 AI 반도체 산업에 던지는 질문

비런테크의 이야기는 한국에 불편한 질문 두 개를 던진다.

첫째, 한국은 메모리에서는 세계 최강이지만 GPU, 즉 연산력 자체를 설계하는 능력에서는 거의 백지에 가깝다. 변호사 출신 창업자가 헤드헌팅 능력 하나로 드림팀을 모아 만든 회사가 자국 시장의 강제 수요에 힘입어 상장 첫날 시가총액 1000억 홍콩달러를 만들어내는 동안, 한국은 같은 시간에 무엇을 설계하고 있었는가.

둘째, 제재가 약점이 아니라 시장을 만들어주는 역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미국의 수출통제가 강해질수록 중국 국내 GPU 수요는 오히려 강제로 늘어났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이라는 위치 때문에 이런 역설적 수혜를 누릴 수 없는 처지이지만, 그렇다면 한국은 한국만의 강제 수요를 어디에서 만들어낼 것인가. 메모리 하나로 버티는 슈퍼乙의 시대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지, 비런테크라는 좌절과 재기의 드라마는 그 질문을 다시 던진다.

사실 장원이라는 인물 자체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변호사가 칩을 설계하지는 않았다, 그는 칩을 만들 사람들을 모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만 길 벼랑에 글자를 새기는 일이 시작됐다. 기술이 없다고 포기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이 좌절과 재기의 드라마가 남기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날카로운 교훈이다. 결국 사람을 모으는 법을 아는 자가 벼랑 위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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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서 박사는

중국 칭화대에서 석사, 푸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우경제연구소에서 반도체와 IT애널리스트로 17년간 일했다. 대우증권 상무, 한화증권 전무를 지내고 이후 19년간 중국경제와 금융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으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중앙대 경영전문대학원에서 MBA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전병서 박사/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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