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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0(수)

성룡이 따거(큰 형님)인 이유[마음을 여는 인맥관리 67]

기사입력 : 2025-12-10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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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이 따거(큰 형님)인 이유[마음을 여는 인맥관리 67]이미지 확대보기
한창 장발단속이 심하던 70년대에 한국을 방문한 성룡의 트레이드 마크인 더벅머리가 경찰의 장발단속에 걸렸다. 한국을 워낙 많이 방문하여 한국말도 좀 할 줄 아는 성룡이 한국말로 슬프게“저 한국사람 아니 예요”라고 했으니 경찰이 봐줬을 리가 없다. 성룡은 7세부터 10년간 희극학원에 맡겨지면서 항상 삭발을 해야 했던데 대한 보상심리로 계속 더벅머리를 고수했다.

성룡은 출생도 남달라 12개월만에 태어나면서 몸무게가 5.5Kg에 달해 지역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프랑스 영사관에서 주방장과 하녀로 일하던 부모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호주 주재 미국 영사관으로 떠나며 성룡은7살에 희극학원에 맡겨졌다. 죽어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했으니 말이 입학이지 일종의 매매계약이나 다름이 없었다. 잠자는 6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무술과 연기수련을 반복했으며 사서삼경이외에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유소년 시절부터 10년간의 혹독한 훈련은 아무리 굴러도 끄떡없는 체력과 자연스러운 스턴트 동작, 강인함, 담력, 기백이라는 큰 자산이 되었고 단체생활의 경험은 숱한 난관을 극복하고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성룡의 아버지는 희극학원의 원장인 우점원을 성룡의 진짜 아버지라고까지 했다.

잘 죽는 놈
희극학원을 나와 무술감독의 ‘따까리’ 생활을 하던 시절 그가 맡은 역할은 주로 시체나 싸대기를 맞고 나가 떨어지는 얼치기 건달의 역할이었다. 성룡은 촬영 현장을 유심히 보면서 단순히 ‘Action’’이 아니라, ‘Rolling’-‘Ready’- ‘Action’의 3단계로 나누어지는 걸 알았다. 시체의 역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작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엑스트라는 경험이 없는 터라 감독이 ‘Rolling’을 외칠 때부터 숨을 참기 시작해 정작 ‘Action’을 외치면 참지 못하고 숨을 터트리기 일쑤였다.

특히 온몸에 칼을 맞고 쓰러진 시체가 움찔거리면 감독은 속이 터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룡은 달랐다. ‘Action’부터 숨을 참기 시작하여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면 감독이 ‘오케이’를 외치며 말했다 “고놈 참 잘 죽네”그렇게 인정을 받으면서 ‘잘 죽는 놈’으로 소문이 나서 시체 연기 일감이 쇄도하면서 점점 화면에 얼굴이 나오는 일이 많아졌다.

성룡을 지켜보던 무술감독이 예의도 바른 모습을 보고 조감독으로 채용하게 되고 그런 성실하고 우직함이 일당 몇 푼짜리 단역의 가난한 무명배우에서 글로벌 스타가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성룡의 영화 원칙: 사람 답게, 완벽하게
이소룡의 사후에 홍콩영화는 침체기에 들어섰고 제2의 이소룡을 찾는데 몰두했다. 어느 날 영화 제작자 오사원 선생이 성룡을 찾아와 원 소속사인 나유감독으로부터 임대를 받아 자신의 새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다는 제안을 했을 때 성룡은 ‘이소룡 신화’에서 벗어나 성룡스타일의 영화제작을 제안했다, 이소룡처럼 초인이 아니라 단점도 많고 평범하고 작은 인물이다. 대개 자발적으로 다툼에 끼어드는 것이 아닌 얼떨결에 등 떠밀려 싸움에 휘말려고 악전고투 끝에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영웅의 영화가 아닌 평범한 사람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다. 성룡 본인의 이야기 인 것이다.

<취권 1>을 본 성룡의 지인이‘재키! 당신 영화는 훌륭해, 그런데 그걸 내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가 없어. 폭력적인 장면들 때문에 말이야. 또 웃기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보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장면들이 있어” 그 이후 <취권2>를 촬영할 때에는 술 마시는 것, 사람 때리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영화를 찍었다. 그후 성룡의 영화는 긍정적인 가치관을 제시하고 저속하고 저급하고 잔인하고 부정적인 내용이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완벽을 추구하는 성룡은 영화 <용소야>에서는 마음에 드는 한 장면을 얻기 위해서 2,900번이나 촬영했으며, 1,600번의 NG를 내었다.

성룡을 이끈 양아버지 하관창
1978년부터 1979년까지 <사형도수>, <취권>, <소권과초> 세 편의 영화가 연달아 대성공을 거두고 난 뒤 ‘골든하베스트’가 480만 개런티의 계약금을 성룡에게 제시했다. 당시 그의 편당 개런티가 3,000홍콩달러였고 홍콩에서 작은 아파트 한 채가 몇 만 홍콩달러 하던 시절이었다. ‘골든하베스트’의 공동창업자이자 제작 담당 부사장을 맡고 있던 하관창은 성룡이 단역이었을 때부터 그의 됨됨이를 눈 여겨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소룡 스타일의 영화가 아닌 성룡스타일의 영화 <액션에 코믹한 요소를 가미한 영화>를 제작비, 제작기간에 관계없이 마음대로 찍을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성룡이 영화의 완벽성을 최대한 구현하고 성공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고 할리우드로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 후에는 성룡의 양아버지가 되어 인생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배우게 했고, 실패와 좌절에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인생에 일이 전부가 아니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다는 걸 깨닫게 하고 그런 작은 것들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성룡에게 어떤 영화에 서든 죽는 연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금지령을 내리는 등 20대의 철없는 청년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내가 위험하면 스턴트 맨도 위험하다. 사람을 존중하는 촬영
성룡은 모든 위험한 액션을 대역을 맡기지 않고 직접 한다. 왜냐하면 엑스트라도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2년말 성룡은 두 가지 타이틀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가장 많은 스턴트를 하고도 생존한 배우”, “한 영화에 가장 많이 이름을 올린 사람’ 이다. <차이니스 조디악>의 영화 제작에서는 성룡이 맡은 역할이 15가지나 되었다.

성룡과 함께 일하는 스턴트팀 <성가단> 직원은 대부분 20~30년 이상 된 사람들이다. 성룡이 1998년에 낸 자서전에서는 가족다음에 동료가 있다. 동료는 친구보다 앞서는 제2의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엑스트라를 모집하는 대행사들이 출연료와 식대 중 일부를 떼어가는 것을 보고는 엑스트라의 일당을 직접 지급하고, 스태프, 배우든 촬영상에서는 모든 참가자가 동시에 먹을 수 있는 식판과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좌석, 천막식당을 준비. 하여 촬영장 환경을 안전하고 건강하고 공정하게 운영을 한다

자선활동을 통해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다
성룡은 회사운영비와 가정 살림에 필요한 돈이외는 모두 기부한다. 이미 전 재산의 50%가 사후에는 자동으로 기부되게 약정을 해 놓았다. 부자들이 죽은 뒤에 재산다툼이 벌어지는 것을 많이 보아, 그의 소망은 잔고가 ‘0’인 통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중국의 원촨 대지진이 발생하자 성룡은 전용기에 물, 음식, 긴급구호물자를 가득 싣고 현지로 떠나 유명 인사 중 제일 먼저 지진현장에 도착했다. 위수 지진때도 마찬가지였다. 재해 지역을 돌아보며 그날 밤 모든 이들과 똑같이 이불도 없이 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재해 지역을 떠날 때는 전용기로 부상자와 가족을 후송했다. 한번은 성룡과 직원들도 전용기로 같이 떠날 예정이었지만 정원이 가득차고 무게 초과로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망설임 없이 전 직원들 데리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여기서 쓸모 없는 사람은 우리들 뿐이니까 우리가 내리자”.
중국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쓰나미, 일본 대지진, 한국 수해 등 재해가 발생한 곳이라면 언제든 달려갔다.

오래전 성룡은 ‘1달러 프로젝트’를 내 놓은 적이 있다. 세계 각지의 아이들이 1달러를 기부금으로 보내오면 성룡도 1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후에 성룡이 2달러를 기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자선활동을 시작하고 여러 번의 좌절과 기복을 겪으면서 겉치레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시상식이나 행사때도 옷 한 벌을 여러 번 입는 등 검소해지기 시작했다. 성룡은 30년 넘게 자선활동을 하면서 ‘초심’이 더욱 확고 해졌다.

성룡자선기금회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운영비를 떼지 않는 단체다. “나는 자선활동을 통해서 사람이 되는 법을 알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알았다; 세상이 불공평하기 때문에 서를 사랑으로 대할 때 세상은 영원히 쓸쓸하지가 않다: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남들에게는 언제나 따뜻한 사람
성룡이 많은 기자와 1:1 인터뷰를 연속하게 되면 같은 말을 수십 번 반복해야 하는 지루하고 피곤함이 있지만 그는 오랜 기다림 끝에 자기 앞에 앉아있는 기자가 ‘성룡을 처음 인터뷰하는 기자’라는 걸 명심하여 기자가 소홀함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영화 제작발표회나 시사회 때도 기자들의 질문이 자기에게만 집중되지 않고 모든 배역에게 골고루 돌아가 동료들이 돋보일 수 있도록 좌석 배치나 질문과 답변의 순서를 조정하고 배려한다.

이런 우직하고 성실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모습이 그를 도와주는 사람을 모이게 하였다. 20대 초반에 출세가도에 올랐지만 자만하지 않고 지금까지 월드스타 따거로 존경받는 이유는 성공 후에도 초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수 박진영은 성룡을 (겸손과 열정>, 배우 김희선은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타인에게는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은 <눈물, 땀, 상처, 설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유쾌한 성룡>을 만들어냈다고 서평에서 성룡을 추천한다.

인용 및 출처: <철도 들기전에 늙었노라, 성룡, 주묵 공저>

윤형돈 칼럼니스트/운을 부르는 인맥관리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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