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은 우리나라를 사랑의 나라, 미소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사랑과 미소를 공부하고 또 동지들에게 사랑과 미소를 권면하였다. ‘훈훈한 마음, 빙그레 웃는 낯’ 이것이 도산이 그리는 새 민족의 모습이었다. 100년이 되거나 1,000년이 되거나, 이 모습을 완성하자는 것이 도산의 민족 운동의 이상이었다.”
남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아야 흥할 수 있다.
도산은 경술국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일본도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요. 그러면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책임자가 누구요? 그것은 나 자신이요. 내가 왜 일본으로 하여금 내 조국에 조아(爪牙 손톱과 어금니, 즉 매우 쓸모 있는 물건)을 박게 하였으며 내가 왜 이완용으로 하여금 조국을 팔기를 허용하였소? 그러므로 망국의 책임자는 곧 나 자신이요.”
“우리는 망국의 책임을 일본에게 돌리고, 이완용에게 돌리고, 양반계급에게 돌리고, 조상에게 돌리고, 유림에게 돌리고, 민족운동자에게 돌린다. 그리고 그 책임지지 아니할 자는 오직 나 하나뿐인 것 같이 장담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 각 사람이 힘있는 국민이었으면 일본이 어찌 덤비며, 이완용이 어찌 매국조약에 도장을 짝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이완용을 책하는 죄로 우리 자신을 죄 하여야 한다”
도산은 우리 민족 각자가 한국은 내 것이요, 한국을 망하게 하거나 흥하게 하는 것이 내게 달렸다고 자각하는 때에 비로소 민족부흥의 여명이 오는 것이라고 하며 민족 불행의 책임을 자기 외에 남에게 돌리려고 하는 것은 비굴한 자의 일이요, 민족의 불행을 초래하는 원인이라고 보았다.
도산은 60평생에 전연 집안일과 생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지사(志士)로서의 절(節)을 지키며 공생활뿐만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한 점도 비난을 받을 만한 것이 없었고 그는 평생에 누구를 속인적도 없었고 누구에게나 야속하거나 부정하게 한 일이 없었다. 그와 접한 일이 있는 이는 모두 그의 사랑과 도우려는 우정을 받았다.
도산을 인격자로 하거니와 그의 인격의 본질을 이룬 것은 쉬지 않는 노력과 수양이었다. 그의 평생은 철두철미, 근엄 그 두 글자로 평할 수 있을 만큼 그는 방심한 일이 없었고 아마 그의 지인 치고 그가 성낸 기색을 보거나 크게 웃거나 근심에 잠긴 양을 본 기억은 없었다.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며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
여성중에서도 그를 사모한 이가 적지 아니하였다. 스승으로 큰 어른으로 사모하던 것이 열렬한 연애로 화했던 여성도 있었다. 그가 남경에 있을 때 어떤 여자가 밤에 그의 침실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에 도산은 천연한 어성으로 ‘아무개’하고 그 여자의 이름을 옆방에서까지 들릴 만한 큰 소리로 불러서“무엇을 찾고 있소? 책상위에 초와 성냥이 있으니 불을 켜고 보오”하고 천연하게 말하였다.
이 말, 이 음성에 그 여자는 정열에서 깨어나 도산의 명대로 초에 불을 당기고 잠깐 섰다가 나왔다고. 그 여자도 말하고 옆방에서 자던 동지도 말하였다.
“그 음성을 들으니 아버지 같은 마음이 생겨서 부끄럽고 죄송하였다”고 그 여자가 술회하였다.
“그 정열을 조국에 바쳐라” 하고 얼마 후에 도산이 넌지시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그 여자는 “나는 조국을 애인으로 하고 조국을 남편으로 하겠습니다”하고 도산의 앞에서 맹세하고 곧 남경을 떠나 유럽으로 유학을 갔다.
도산은 비록 17,8세의 소년과 문답을 하는 경우에도 자기가 높은 자리에 있는 빛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나 다 평등의 지위에서 물었고 평등의 지위에서 대답하는 말을 존중하였다. 그는 평시에도 남이 말을 중간에서 가로막거나 억누르는 일이 없었다. 비록 그것은 척 보기에 어리석은 말이라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심정을 존중하고 한 말 한 마디를 집중하여 귀를 기울여 들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을 그냥 가지고 돌아가게는 아니하였다. 가르친다는 의식이 없이 그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여기 도산의 사람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 있었다.
어떤 중국사람 관상가가 도산을 상을 보며 그의 눈자위에 자비상이 있으나 살생을 기탄없이 행하여야 하는 혁명가나 정치가가 될 수 없다고 한 것은 확실히 그의 성격을 알아낸 것이었다. 그는 일면 철석과 같은 의지의 사람이면서 부드러운 인정이 사람이었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따뜻한 인정의 실천
도산은 인류에서 가장 귀한 것이 인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도산은 전우와 동지의 불행을 볼 때에는 매양 자기를 잊어버렸다. 동오 안태국이 병사한때에는 헌신적 간호와 후한 장례를, 상해에서 윤현진이 병에 걸렸을 때는 자기의 주머니를 털어서 이천금을 들여서 그의 치료에 전력을 다하였고 여운형이 러시아 여행중에 그 처자의 생활이 곤란하다는 말을 듣고 여러 달 동안 생활비를 보냈다. 그때는 여운형과 일면식도 없을 때였다. 조국을 위하는 방향은 같지만 실천하는 방식은 거칠고 매우 달랐던 이갑이 병에 걸렸을 때는 미국에서 막노동으로 번 전 재산 1,000불을 부인과 상의하여 보냈다, 이갑은 그 돈을 받고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도산은 광복은 내가 하기에 있다. 내가 하면 된 다라고 생각했다. 조국이 부강한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다른 동지들과 다름이 없었지만 오직 한가지 다른 점은 다른 동지들은 이 민족을 그냥 가지고 혁명운동만으로 또는 정치운동만으로 당장에 그 부강한 조국을 이루자는 데 대하여 도산은 민족의 품격과 역량을 향상하는 것이 혁명이나 정치에게도 어머니가 되어, 부강한 조국에 급속히 도달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의 4대 정신으로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 생활의 훈련을 힘쓰며, 한 가지 이상의 전문학술이나 기예를 반드시 학습하고 평생에 매일 지(智), 덕(德), 체(體) 3육에 관한 행사를 반드시 하여서 건전한 인격자가 되도록 기하자는 것이었다.
도산의 삶
도산의 삶은 ‘진실을 삶의 지팡이로 하고, 사랑을 생활화하고, 일에는 진실되게 충성하고, 동족에 대해서는 믿음을 다하며, 조국에 성심껏 봉사하고, 동지에 대해서는 신의를 다하고, 언제나 존엄하고 엄격한 생활을 견지한 뛰어난 민족의 지도자’였다도산은 1932년 4월 29일, 의사 윤봉길이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최고 지휘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등을 폭살하는 사건이 생긴 후 일본 관원이 한국인 대수색을 행할 때 불행히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었다, 이 날은 마침 도산이 아는 사람의 아들인 어떤 소년의 생일이었고 도산은 그 소년에게 생일선물을 준다고 약속한 일이 있어서 그 집을 찾았다가 잡혀서 경성으로 압송된 후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다가 1938년 3월 10일 자정에 경성대학 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서거하였다. 유해는 망우리에서 1973년 11월 10일 도산의 95회 생신과 흥사단 창립 60주년을 맞아 서울 강남구 소재 도산공원에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와 함께 안장되었다.
출처 및 인용: 도산 안창호 (춘원 이광수 지음)
윤형돈 칼럼니스트 (인맥관리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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