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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0(월)

잘못 끼워진 첫 단추, 주센 정리와 일본 금융시스템의 혼란 [김성민의 일본 위기 딥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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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끼워진 첫 단추, 주센 정리와 일본 금융시스템의 혼란 [김성민의 일본 위기 딥리뷰]이미지 확대보기
1990년대 초 일본 금융시장의 불안은 주택전문금융회사 즉 주센(住専)의 부실 문제가 부각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주센은 1970년대 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설립한 비은행 금융기관이었다.

1993년 이들의 부실이 외부에 최초로 공개된 이후 1995~1996년에는 금융시장의 최대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주택담보대출을 전문으로 하는 주센들이 심각한 부실 상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미 불안정했던 일본 금융시스템의 안전망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1970년대 중반 일본 정부는 주택금융공공공사 등을 중심으로 한 공적 금융만으로는 급증하는 주택 자금 수요를 충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민간 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을 전담할 수 있도록 별도의 비은행 금융회사인 주센을 설립하도록 유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총 7개의 주센이 설립되었으며 각 주센은 특정 은행 그룹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개별 주센은 2~4개의 대형 은행이 공동 출자하여 지분을 보유했는데 이 은행들을 ‘설립은행’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미쓰비시은행·산와은행·도카이은행은 함께 ‘일본주택금융’을 설립했고 이 세 은행이 해당 주센의 설립은행이었다.

주센은 형식상 독립된 비은행 금융회사였지만 실제로는 설립은행의 자회사이자 주택담보대출을 담당하는 대출 창구 역할을 수행했다. 주센의 자금 대부분은 설립은행으로부터의 차입에 기반했으며 주센은 이를 개인이나 중소 부동산업자에게 재대출하는 영업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주센에서 이익이 발생하면 배당의 형태로 설립은행에 돌아갔지만 손실이 발생할 경우 그 부담은 고스란히 설립은행의 부실로 귀속되었다.

또한 주센은 은행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당국인 재무성의 직접적인 규제를 받지 않았다. 이로 인해 주센은 감독의 사각지대에 놓인 일종의 ‘그림자 금융(shadow banking)’으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버블 경제가 본격화되면서 주센의 영업 방식도 큰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주센은 원래 은행의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주거용 부동산 대출을 담당하는 보수적인 금융기관이었지만 버블기 들어 은행들이 직접 주택담보대출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면서 주센의 기존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설립 당시 부여된 역할이 약화되자 주센은 새로운 수익원을 확보하기 위해 상업용 부동산 대출로 눈을 돌렸고 부동산 가격 폭등과 주택 수요 증가라는 시장 분위기에 편승해 부동산 개발업체와 건설 관련 기업에 대한 고위험 대출을 빠르게 늘려 나갔다. 그러나 주센은 상업용 부동산 대출에 필요한 전문성이나 심사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대출을 확대했기 때문에 이러한 행태는 결국 막대한 부실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와 동시에 주센은 대형은행에 비해 느슨한 규제를 적용받았기 때문에 버블 기간 동안 부동산 관련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공격적으로 대출을 확대할 수 있었다. 대형은행들은 이러한 규제 차이를 활용해 주센에 자금을 공급하며 대출 심사나 영업 방향에도 사실상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버블 시기 은행들은 직접적인 기업대출이 금융 규제나 내부 한도에 막히자 주센을 우회적인 대출 창구로 활용해 부동산 시장에 자금을 계속 투입했다.

또한 1990년 재무성이 도입한 부동산 대출총량규제가 주센에는 적용되지 않으면서 주센은 규제의 영향을 받지 않고 부동산 관련 대출을 적극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그 결과 주센의 대출 포트폴리오는 부동산 가격 상승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로 변했고 담보가치가 보장되는 한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대출이 특정 자산에 집중되면서 위험 분산은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0년 무렵 자산가격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주센의 부실은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 가격 폭락으로 담보가치가 대출금보다 낮아지자 대출 회수가 어려운 채권이 급격히 늘어났다. 특히 주센은 자본기반이 매우 취약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자금을 설립은행 차입에 의존했기 때문에 손실을 감당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주센에 대한 대출은 버블 기간 동안 대형은행들이 비은행 금융기관에 확대해온 대출 가운데에서도 부실 위험이 가장 크게 나타난 부문이었다. 1991년 재무성이 7개 주센을 검사한 결과 전체 대출의 약 40%인 4.6조 엔이 부실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재무성은 즉각적인 정리 대신 10년에 걸친 개선 기간을 허용하며 규제를 유예했고 이는 주센 문제 대응의 첫 단계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재무성과 주센 설립 과정에서 자금 출자, 채권 인수, 정책적 지원을 제공하며 주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소위‘설립은행’들은 부실 문제 해결을 위해 구조조정 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했다. 이 계획에는 설립은행의 대출 감면과 금리 인하, 비설립은행의 신규 자금 지원, 주센의 비용 절감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주센의 재무 상태는 개선되지 않았고 부실 채권 규모는 오히려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재무성은 1993년 두 번째 주센 구조조정 계획을 마련하였다. 이 계획은 주센의 이자 부담을 완화해 부실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설립은행의 대출 금리를 0%, 비설립은행은 2.5%, 농업협동조합은 4.5%로 인하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향후 10년 동안 부동산 가격이 25% 상승하고 경제가 빠르게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을 전제로 설계되었다.

주센 사태는 이후 은행 부실 사태에 비하면 규모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였지만 재무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주센 구조조정을 주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무성이 추진한 구조조정 방안들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경제전망에 의존하고 있어 현실성이 떨어졌다는 점이 주요한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재무성의 희망성 기대와는 달리 일본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지 않았고 주센의 부실은 오히려 심각한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1995년 여름 재무성이 실시한 검사 결과 7개 주센의 총대출 12조 8,000억 엔 중 9조 6,000억 엔이 부실대출로 분류되었으며 이 중 6조 4,000억 엔은 회수가 불가능한 손실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손실을 설립은행들이 대손 처리할 경우 해당 금융기관의 자본이 급격히 감소하여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질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위기 대응이 불가능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러한 부실 규모가 공개되자 의회에서는 주센 문제 해결 방안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정부는 주센의 자산과 부채를 정리하기 위한 특별 조치 즉 이른바「주센법」을 제정하고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구조조정 방안을 마련하였다.

주요 내용은 (1) 주센의 총손실 중 3.5조 엔은 설립은행들이 채권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부담하고, (2) 1.7조 엔은 주센에 자금을 빌려준 비설립은행들이 채권을 포기하며, (3) 농업협동조합은 5,300억 엔을 사실상 증여 형식으로 부담하고, (4) 남은 6,800억 엔은 정부가 공적 자금을 투입해 책임을 분담하기로 하였다. 또한 회수가 가능하다고 판단된 장부가 6.6조 엔 규모의 대출 채권은 새로 설립된 ‘주택대출관리기구’에 이관하도록 결정되었다. 이를 통해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금융 시스템의 혼란을 최소화한다는 것이 정부의 의도였다.

정부가 제시한 계획 특히 공적자금 투입 방안은 일반 국민의 강한 반발에 직면했다. 이에 정부는 기존 방안을 수정해 해당 은행들이 경영을 효율화하고 이익을 늘려 손실을 보전하며 법인세 감면을 통해 6,800억 엔을 확보한다는 새로운 계획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수정안은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더욱이 야당이 이 수정안에 강하게 반대하면서 정부는 결국 1996년 6월에 결정된 원래의 손실 분담 비율에 따라 주센 지원을 위한 공적자금 사용을 승인하는 예산안을 가까스로 통과시켰다.

주센 정리 방식은 부실을 일으킨 주된 책임이 있는 은행들의 대출 관행과는 무관하게 감당 능력이 있는 금융기관들이 비용의 상당 부분을 떠안도록 설계되었다. 즉 부실 금융기관에 얼마나 깊게 관여했는지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부담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가 비용 분담 비율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는 손실을 감당하기 어려운 기관에는 부담을 최소화하고 감당 가능한 기관에 더 큰 책임을 지우는 일종의 ‘최약자 보호 원칙‘이 채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주센 문제에서는 농업협동조합이 부담 능력이 가장 낮은 기관으로 간주되어 손실 부담 규모도 가장 적게 책정되었다.

이 방안에 따르면 주센의 부실 대출로 인해 발생한 1차 손실은 주택대출관리기구가 인수·정리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주택대출관리기구에 추가로 발생하는 2차 손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금융기관들로부터 약 9,000억 엔을 갹출해 금융안정화기금을 조성하고 그 운용수익으로 2차 손실의 약 절반을 충당하며 나머지는 공적자금으로 보전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실제로 2차 손실 보전을 위해 사용된 공적자금은 약 4,796억 엔으로 추정된다.

일본은행 또한 주센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구체적으로 일본은행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본금을 출자했다. 첫째로 주센의 잔여 부실채권을 인수·정리하기 위해 설립된 주택대출관리기구에 1,000억 엔을 출자했다. 둘째로 주센 사태 이후 부실 정리 부담으로 은행들의 자본이 약화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설치된 신 금융안정기금에도 1,000억 엔을 출자했다. 이처럼 일본은행의 지원은 모두 자본금 출자 형태로 이루어졌다.

결국 주센 문제는 1996년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과 주택대출관리기구의 설립을 통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사태는 주센이라는 개별 금융회사의 경영 실패에 그치지 않고 일본 금융시스템에 내재된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냈다. 다시 말해 주센의 부실은 단순한 경영상의 실패라기보다는 은행이 보유한 위험을 제도적으로 비은행 부문으로 이전해 온 금융구조가 한계에 봉착하며 붕괴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는 소위 ‘그림자 금융’에 대한 감독 부재가 초래한 필연적 귀결이었다.

한편 주센 파산 처리 과정에서 일부 금융기관이 정부와 정치권에 로비를 벌여 손실을 불공정하게 분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부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었다. 특히 1995년 주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정치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농업협동조합은 주센의 최대 투자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손실 부담을 피하기 위해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 결과 농협의 부담은 최소화되고 부족한 자금은 공적자금으로 충당된 사실이 드러났다.

예일대학교의 크리스티안 맥나마라(Christian McNamara)와 앤드루 메트릭(Andrew Metrick)은 주센 사태의 해결 방식이 일본 금융위기에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첫째로 주센 문제가 1991년부터 금융시스템을 위협하는 중대한 위험 요소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규제 당국은 이를 신속히 정리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자’는 관용적 태도를 유지했으며 결국 청산이 1996년까지 지연되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주센 해결과정이 금융위기 초기의 소극적·관망적 대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있다.

둘째로 주센 정리를 위해 투입된 공적자금은 부실채권 규모 약 6.4조 엔의 약 10%에 해당하는 6,800억 엔에 불과했지만 정부가 “공적자금은 투입하지 않겠다”는 기존 방침을 스스로 철회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정책적 전환으로 평가되었다. 이들은 이러한 결정은 국민적 반발과 강한 여론의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이후 더 심각한 금융불안이 발생했을 때 정부가 공적자금 투입을 신속히 결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정부가 금융시스템의 핵심 인프라라고 할 수 있는 결제시스템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비은행 주택금융회사인 주센을 국민의 세금으로 구제했다는 비판에 직면하면서 금융위기 해결에 필요한 공적자금 조달을 위한 입법 추진에 대한 국민적 반감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고이즈미 내각에서 재정경제담당 장관과 금융담당 장관을 지낸 다케나카 헤이조는 게이오대학 교수 시절부터 주센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을 강하게 비판해온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이유는 은행이 예금계좌를 통해 결제를 담당하며 이는 금융시스템의 기반인 결제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 주센은 일반 국민의 예금을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결제시스템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에 공적자금 투입의 정당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정부가 주센에 공적자금을 투입한 진짜 이유가 주센이 파산할 경우 주센에 가장 많은 자금을 대출했던 농업협동조합이 큰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며 이는 농협의 책임을 감추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었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주센 사태를 계기로 형성된 공적자금 투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이후에도 장기간 지속되었다. 특히 몇 년 뒤 대형 은행들의 부실이 본격화되어 더 대규모의 공적자금이 필요한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정부는 의회의 동의를 얻는 데 부담을 느끼며 공적자금 투입 요청을 주저했고 이는 오히려 금융위기의 심화를 초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공적자금 = 세금으로 부실은행 살리기’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여당인 자민당조차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 반발을 우려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야당은 이를 ‘대형은행 구제책’으로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언론 역시 “서민은 고통받는데 은행만 살리려 한다”는 논조를 앞세워 여론을 부추겼고 이로 인해 공적자금 투입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는 분위기까지 조성됐다. 이와 같은 공적자금 사용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금기는 1997년 가을 주요 은행을 포함한 금융기관들의 연쇄적인 파산으로 금융위기가 폭발적으로 확대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김성민 교수(전.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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