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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7(월)

고요한 붕괴: 1990년대 초 일본 경제의 안정 속 불안 [김성민의 일본 위기 딥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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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붕괴: 1990년대 초 일본 경제의 안정 속 불안 [김성민의 일본 위기 딥리뷰]이미지 확대보기
1980~1990년대 일본의 버블 경제 시기 부동산을 담보로 한 대출과 투자에 깊이 관여했던 대표적 비은행금융기관인 고코 그룹과 스즈키 그룹은 자산 버블의 붕괴가 단기적으로 외환이나 유동성 위기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자본 수출국이었기 때문에 단기적인 자본 유출이나 환율 불안으로 금융위기가 급속히 확산될 가능성이 낮으며 버블 붕괴의 충격은 국내 경제 내부에서 충분히 흡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이들의 주장대로 버블 붕괴 직후에는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금융기관들의 산발적인 도산에 그쳤다. 1990년 초 자산 버블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1991년 이후 일본 금융기관들의 간헐적인 파산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91년 도호소고은행의 파산은 일본 전후 최초의 은행 파산 사례였다. 예금보험공사의 첫 개입 역시 1992년 4월 도호소고은행의 정리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이요은행이 도호소고은행의 자산과 부채를 인수할 때 금융지원을 제공하였다.

이후 예금보험공사는 1992년 10월 도쿄신킨은행과 1993년 5월 가마이시신킨은행의 정리를 각각 지원했다. 당시 파산한 금융기관들은 대부분 소규모에 국한되었고 국지적 문제로 인식되어 금융시스템 전반에 미친 충격은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소형 금융기관들의 도산은 상호 연관성 없이 독립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금융시스템의 불안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버블 붕괴 직후 관찰된 겉보기의 안정 단계는 금융위기가 잠복기를 거쳐 표면화된다는 일반적 전개 패턴을 잘 보여준다. 자산 가격의 급락이 곧바로 금융위기로 이어지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일정 기간의 금융불안 또는 재무적 곤경(financial distress) 단계를 거치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는 투자자들의 심리가 낙관에서 비관으로 급격히 전환되면서 차입자들의 부채가 소득 수준에 비해 과도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신용시장 전반에 불안이 고조된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대출자들은 위험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대출 심사를 강화하고 차입자들 역시 원리금 상환을 위한 현금 확보와 부채 축소에 나선다. 그 결과 신용위험이 높은 차입자에 대한 기존 대출이 만기에 회수되거나 신규 대출의 기준이 한층 엄격해진다. 이러한 재무적 곤경의 상태는 경제 상황에 따라 짧게는 수주 길게는 수년간 지속될 수 있다.

일본의 경우도 자산 버블 붕괴 이후 금융기관의 도산이 본격화되어 금융위기로 발전하기 전까지의 시기를 금융불안 또는 재무적 곤경 상태로 볼 수 있다. 다만 금융불안이 지속된 기간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찰스 킨들버거 등은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에서 일본의 금융불안은 버블 붕괴 직후인 1990년대 초부터 뱅크런과 은행 국유화가 나타난 1997~1998년까지 지속되었다고 본다. 반면 나카소 히로시 전 일본은행 부총재는 부동산 가격 하락이 시작된 1991년부터 위기가 본격화되기 직전인 1994년 상반기까지를 ‘초기 단계’로 규정하였는데 이 시기를 금융불안 상태에 해당하는 국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1990년 초부터 자산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산 버블의 조정을 계기로 일본 경제가 보다 균형적이고 지속 가능한 성장 궤도로 복귀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우세하였다. 실제로 버블 붕괴 이후 경제성장률은 이전보다 다소 낮아졌으나 여전히 플러스 성장을 유지하였고 이에 따라 담보로 활용되던 자산 가격도 조만간 회복되어 금융시스템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적 기대가 확산되었다. 더욱이 일본의 경우 전후에 주요 금융기관의 파산 사례가 전무했다는 점과 은행들이 재무성의 엄격한 규제 하에 있었고 일본은행의 면밀한 감시 하에 있었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주요 금융기관의 도산 가능성은 희박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낙관적 인식 아래에서 정책당국은 적극적인 대응보다는 상황을 관망하는 태도를 유지하였다.

재무성은 자산 가격 하락이 본격화되던 1990년부터 1994년까지 매년 주가 부양 조치를 시행하며 주가 하락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조치는 일본식 행정 지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직접적인 공개시장 매입보다는 민간 금융기관을 통한 간접적 개입이 주된 방식이었다. 재무성은 주요 증권사와 대형 은행에 대해 주가 안정을 위한 매수 압력을 행사하는 한편 이들 금융기관에게 보유 주식의 장기 보유를 요구하였다. 또한 증권거래세 감면, 자사주 매입 규제 완화, 보험회사·연기금 등 기관투자가의 주식 보유 비중 확대 유도 등 주식시장 제도 개편 및 규제 완화 조치를 병행하였다. 이와 함께 은행과 보험회사가 보유한 주식에 대해 시가 평가를 회피할 수 있는 관용적 회계기준을 허용함으로써 금융기관의 손실 인식을 지연시켰다.

재무성의 주가 부양책은 단기적으로도 시장 안정에 뚜렷한 효과를 보이지 못했으며 중장기적으로는 주가 회복이나 금융시스템 정상화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결과적으로 재무성의 이러한 개입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지연시키는 시간을 벌어주었지만 그 시간을 구조조정과 금융시스템 개혁에 활용하지 못하고 현상 유지에 급급했다는 점이 정책의 치명적 결함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정책당국의 희망적 낙관론과 잇따른 주가 부양책에도 불구하고 자산 가격 하락은 멈추지 않으면서 점차 금융시스템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주가 상승기에 자본 확충을 통해 낮아졌던 부채비율은 주가 하락과 함께 다시 상승하였고 일시적으로 완화된 것으로 보였던 기업의 재무 리스크 또한 재차 확대되었다.

자산 버블이 붕괴하면 비현실적인 이익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면서 자산가치가 급격히 하향 조정된다. 이 과정에서 높은 레버리지에 기반하여 투자를 확대했던 경제주체들은 채무 상환 압력에 직면하게 되고 그 결과 금융기관의 부실 위험이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한다. 특히 기업 부문에서는 부채 규모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산가격이 하락함에 따라 대차대조표 구조가 악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후 진행된 디레버리징(deleveraging) 과정은 기업의 부채 수준이 비정상적으로 높다고 인식되고 내부 자금만으로는 투자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는 한 기업의 투자 활동을 장기간 제약하게 된다. 과도한 부채를 보유한 유동성 부족 기업일수록 새로운 투자 기회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실물경제 전반의 성장 둔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일본의 금융기관들은 전반적으로 부동산 관련 산업에 과도하게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의 하락은 금융시스템 전반에 막대한 리스크로 작용했다. 경제성장률이 현저히 둔화되는 상황에서 부동산과 주식 가격 하락이라는 공통 리스크 요인(common risk exposure)이 중첩되면서 은행의 대출 손실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1990년대의 지가 하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발생한 대규모 자산가격 조정이었다. 특히 주가 버블이 붕괴되면서 은행이 보유한 주식의 가격이 급락하자 그동안 장부상에 반영되지 않았던 미실현 자본이익이 급감하였고 이로 인해 다수의 은행에서 자본금 기반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자본금이 감소한 은행들은 자기자본비율 규제에 직면하면서 대출 여력을 상실하였고 동시에 위험도가 높은 신규 대출이나 투자 활동을 회피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금융기관의 신용공급이 위축되며 실물경제의 경기둔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악순환 과정이 전개되었다.

일본의 은행 대출 구조를 감안할 때 지가의 급락이 심각한 금융위기로 이어진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히토츠바시대학의 시미즈 요시노리는 일본의 담보 대출 구조에서 부동산 담보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주가 하락보다 지가 하락이 금융시스템 안정성에 훨씬 더 큰 충격을 주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일본은행과 게이오대학의 후카오 노부유키의 추정에 따르면 1989년 당시 일본 은행들의 담보대출 중 주식을 담보로 한 대출은 약 14~17%에 불과했으나 부동산 담보 대출은 전체의 약 44%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면서 은행이 보유한 담보 자산의 가치가 크게 하락하였고 이는 대출 포트폴리오의 질적 악화를 초래하여 결과적으로 부실채권이 급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담보가치의 급락으로 인해 대출 회수액이 원금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동시에 차입자인 가계와 기업의 자산가치가 하락하면서 원리금 상환 능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그 결과 은행 부문에서는 대규모 부실채권이 발생하였으며 부동산 개발업체와 건설사의 연쇄적인 도산으로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가 중단되면서 추가적인 손실이 발생했다. 이러한 부실이 누적되면서 1993년경에는 주요 은행들의 부실채권 규모가 약 40~60조 엔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동산 및 주식 가격 하락으로 대출 손실이 증가하자 은행들은 이를 자체적으로 보전하기 위해 보유 주식을 매각하여 이익을 실현한 뒤 다시 재매입하는 이른바 ‘자전거래’를 확대하였다. 당시 은행이 보유한 주식의 미실현 자본이익은 일종의 숨겨진 준비금으로 작용하여 손실 흡수 능력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전거래가 반복되면서 주가 하락이 가속화되었고 그 결과 보유 주식의 시가평가액은 지속적으로 감소한 반면 장부가는 재매입으로 인해 매입가 오히려 높아졌다.

이로 인해 시가와 장부가 간의 괴리가 빠르게 축소되었다. 실제로 주요 은행들의 주식 보유로 인한 미실현 자본이익은 주가가 정점에 달했던 1989년 3월말 약 49.1조 엔에서 1993년 3월말에는 약 21.9조 엔으로 급감하였다. 즉 불과 4년 사이에 미실현 자본이익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1990년 이후 일본 은행들은 잇따른 신용등급 강등과 지속적인 주가 하락으로 인해 신주 발행을 통한 자본 확충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규제상 은행이 보유한 주식의 미실현 이익 중 45%가 보완자본(Tier 2 capital) 으로 인정되어 BIS 자기자본비율을 충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1990년 이후 주가가 급락하면서 이러한 보완자본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로 인해 은행들의 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큰 압박을 받게 되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대응이 불가피해졌다. 은행들은 위험가중치가 높은 대출 자산을 축소하는 한편 위험가중치가 낮은 국채 투자 비중을 확대함으로써 자기자본비율을 약 9%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도쿄대학의 호시 다케오와 시카고대학의 아닐 카시야프는 일본 은행들이 대출 상환 가능성이 극히 낮은 부실기업에 대해 의도적으로 자금 지원을 지속한 점을 일본 은행 산업의 “가장 큰 수수께끼”로 지적했다. 이러한 소위 ‘상록수(ever-greening) 현상’이 발생한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로 대규모 해고를 초래할 기업의 파산을 피하고자 하는 정부의 암묵적 혹은 노골적 압력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로 은행들 역시 주요 거래기업의 파산을 허용할 경우 그 손실을 자본금으로 충당해야 하므로 자본 부족 사태를 막기 위해 부실기업에 대한 대출을 지속했을 가능성이 크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상환이 의문시되는 기업에 추가로 대출을 제공하는 것은 이익 극대화라는 은행의 기본 목표에 어긋난다. 그러나 이미 대규모 대출을 떠안은 은행의 입장에서는 추가 대출을 중단하면 해당 기업이 도산해 부실채권이 급증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자금을 더 빌려주며 사태의 호전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자본금 비율이 낮은 은행일수록 이러한 부실기업 대출이 더 많았다.

결과적으로 은행들은 미래 성장을 견인할 신규 프로젝트보다는 기존 부실기업의 연명을 위한 차환대출이나 추가 자금 지원에 자원을 집중했다. 이로 인해 경제 전체의 생산적 자금 배분이 왜곡되었고 경기 회복을 이끌어야 할 부문에 대한 대출은 오히려 위축되었다. 이러한 행태는 결과적으로 역선택(adverse selection)을 초래하여 경기 회복을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금융시스템 내에 막대한 잠재적 부실대출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중반까지는 금융불안이 일부 소형 금융기관에 한정된 문제일 뿐 전체 시스템으로 확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낙관적인 시각은 예금자와 투자자 그리고 일반 국민들이 개별 금융기관의 재무건전성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일본 은행들의 재무상태가 외부에 명확히 드러나지 못한 데에는 구조적인 요인이 존재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불충분한 충당금 적립과 부적절한 공시 관행이었다. 일본에서는 은행이 대손충당금을 적립할 때 높은 디폴트 확률 등 엄격한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 결과 버블 붕괴 직후에도 은행들은 충분한 대손충당금을 쌓지 않았으며 1990년대 중반까지는 미래의 예상 손실은 물론 이미 현실화된 손실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부의 투자자나 감독당국은 은행 자산의 질적 악화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한편 1992년 이전까지는 부실대출에 대한 공시 의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1992년에 도입된 초기 공시제도 역시 세법 기준에 따라 법적으로 파산한 차주에 대한 대출이나 180일 이상 연체된 대출만을 공시 대상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상당 부분의 부실대출이 여전히 공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책당국자들은 금융시스템 내에 잠재된 막대한 부실대출 규모가 초래할 위험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으나 일반 국민들의 위기에 대한 긴박감 부족과 공적자금 투입에 대한 거부감 등으로 인해 적극적이고 단호한 대응에 나서지 못했다. 재무성의 초기 대응은 금융기관의 건전성 규제 적용을 일시적으로 완화하거나 집행을 지연하는 소위 ‘규제유예(regulatory forbearance)’를 통해 부실은행을 보호하고 동시에 경제 성장과 자산가격이 회복될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다. 하버드대학교의 벤저민 프리드먼(Benjamin Friedman)은 이러한 일본 정책당국의 초기 대응이 1986년 미국의 저축대부조합(S&L) 위기 당시 미국 정책당국이 취했던 규제유예 중심의 관용적 접근과 유사했다고 지적했다.

은행들이 회계상 손실 인식을 회피하는 동안 정책당국 역시 감독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다. 당국은 손실 발생 시 감독 소홀에 대한 책임 추궁을 우려하여 은행들로 하여금 손실을 조기에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조치의 시행을 지연시켰다. 특히 정책당국은 회수 가능성이 의심되거나 담보가치가 대출금액보다 낮은 대출을 부실대출로 분류하지 않아도 되도록 감독 기준을 완화하는 형태의 ‘규제유예’를 빈번히 활용했다.

이러한 규제유예의 남발로 인해 은행들의 부실대출 관련 정보에 대한 신뢰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정책당국이 이처럼 규제유예에 의존한 것은 향후 경제 상황이 개선되면 부실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를 일정 부분 반영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히토쓰바시대학교의 시미즈 요시노리는 일본의 관용적 정책을 정치인이나 관료의 미흡한 대응 혹은 일본 특유의 제도적 특성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사태가 반세기 가까이 지속되어 온 ‘호송선단식 규제’의 구조적 귀결이며 그 과정에서 강력한 기득권이 형성되었다고 분석했다. 이는 본래 공익을 위해 존재하는 규제기관이 시간이 지나면서 규제를 받는 산업이나 기업의 이해관계에 포획되어 결국 공공의 이익보다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의 ‘규제 포획 이론(capture theory of regulation)’과 일치한다.

시미즈 요시노리는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이러한 기득권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자산 버블 붕괴로 부실대출 규모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마치 암 수술을 시도했지만 암세포가 지나치게 퍼져 수술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의사처럼, 정책당국은 우왕좌왕하며 체계적인 대응책 마련에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자산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상황에서는 필요한 공적자금의 규모조차 추정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금융시스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하려면 국민적 지지가 필수적이지만 당시 일반 국민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이를 위해서는 부실자산의 규모를 투명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었으나 동시에 그 완전한 공개는 금융패닉을 초래할 위험이 있었다. 시미즈는 이러한 딜레마가 정책당국이 시간이 지날수록 금융위기 종식을 위해 더 많은 공적 자금을 투입하게 되면서도 관용적 정책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 이유였다고 주장했다.

한편 일본은행 부총재를 역임한 와세다대학교의 와카타베 마사즈미는 버블 붕괴 이후의 위기 상황에서 일본 정치권이 부실채권 처리보다 정치 제도 개혁에 몰두함으로써 금융위기 대응이 지연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이러한 정치적 관심의 편향이 부실채권 정리와 금융구조 개혁을 위한 정치적 결단을 늦춘 주요 요인이었다고 주장했다.

1993년 자민당의 핵심 인물이던 오자와 이치로와 하타 쓰토무 등이 탈당하여 신생당을 결성하였다. 이는 1955년 체제 이후 자민당이 처음으로 단독 정권을 상실하게 만든 정치적 전환점이었다. 오자와는 자민당의 파벌 중심 정치와 금권정치가 일본의 거버넌스를 왜곡시켜 왔다고 비판하며, 정치개혁을 통해 일본 정치의 “정책 중심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 일본 정치권의 주요 관심사는 금융시스템의 안정이나 부실채권 정리와 같은 경제 현안이 아니라 소선거구제 도입·정당보조금 제도·행정개혁·정치자금 규제 등 제도적 정치개혁으로 옮겨갔다.

와카타베는 이러한 정치 개혁 논의가 “정치권의 에너지를 금융·경제 문제에서 정치 시스템 문제로 분산시켰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나아가 일본의 장기침체를 단순한 경제정책 실패가 아니라 정치적 분열과 정책 우선순위의 왜곡이 초래한 복합적 위기로 해석하였다.

김성민 교수(전.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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