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기정, 올림픽 마라톤대회 최고 기록 ‘2시간 29분 19초 2’로 우승
1936년 8월 9일 오후 3시, 27개국에서 출전한 56명의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의 스타트라인을 출발했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는 1932년 LA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였던 아르헨티나의 자발라, 이미 1년전에 베를린에 도착하여 대통령의 비서1명이 붙어 다니는 지원을 받으며 현지에서 연습을 해왔다. 손기정이 10Km 지점에서 영국 선수 어니스트 하퍼를 앞지르자 하퍼가 “슬로우 슬로우”를 외치며 손기정의 오버페이스를 염려해주었다. 줄곧 선두를 달리던 자발라는 30Km 지점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쓰러지면서 의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손기정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40Km지점의 비스마르크 언덕을 넘어서자 적십자마크를 단 간호사가 그를 반기며 차가운 물을 건넸다. 남은 2Km는 완만한 내리막길이었다. 손기정은 올림픽 스타디움에 운집한10만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전력을 다해 마지막 트랙을 나는 듯이 달려 결승테이프를 가슴에 걸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손기정은 의도적으로 일장기가 붙어있는 선수단복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입고 다니지 않아 경고를 받기도 했으며 사인을 요청하면 한글로 사인하면서 KOREA를 함께 표기했다. 시상식에서는 옷에 부착된 일장기를 꽃다발로 가렸는데 3위로 시상대에 오른 남승룡도 일장기를 가리고 싶었는데 꽃다발을 가진 손기정이 무척 부러웠다.

손기정의 재능을 알아보고 기초를 만든 이일성 선생
손기정이 보통학교 5학년때 만난 5,000m, 10,000m 선수출신 이일성 선생은 손기정의 재능을 알아보고 달리기의 기초를 가르쳤다. 체계적인 지도를 받은 손기정은 6학년때 어른을 제치고 신의주 대표로 뽑힐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어려운 집안 형편에 돈을 벌어야했던 어린 손기정은 공병우 박사의 부친인 공정규가 운영하는 동익상회에서 일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1930년 평안북도 대표로 선발되어 조선신궁경기대회 5,000m 2위에 올랐다. 경성에서 열리는 조선신궁경기대회에 참여하면서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대회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후에 경성을 들락날락하면서 육상의 명문 양정고에 입학하여 과학적인 달리기를 하고 싶은 면학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양정고 동문과 스승의 후원
손기정은 신의주 선배였던 양정의 황대선 선배의 추천으로 20세의 나이로 양정고 1학년에 입학하였지만 생계가 문제였다. 1학기를 겨우 마치고 학업을 포기하려는데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양정고 3학년이던 이병옥 선배와 김봉수 선배가 1학년인 손기정을 가정교사란 핑계로 그들의 부친을 설득하여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이 양정고를 졸업하고 난 뒤에는 대구 달성 부잣집 아들로서 400m 육성선수인 이달희가 손기정의 뒷바라지를 하는 조건으로 양정에 들어오면서 베를린에 출전할 때까지 또 한번 엉터리 가정교사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양정고 육상부의 끈끈한 동지애가 손기정이 달리기를 포기하지 않고 성장하게 만들어준 것이다.동서남북을 옮겨 다니며 잠자리는 마련했으나 배고픔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허기가 져서 제대로 달릴 수 앖었던 손기정은 체육담당교사인 김수기 선생을 찾아갔다. 김수기 선생도 일본에서 고학을 했으니 그의 배고픔을 이해해 줄 것만 같았다. 손기정은 다짜고짜 ‘형님, 배가고파 못 뛰겠습니다. 저 좀 도와주십시오. 매월 5전만 주십시오”하고 졸랐다. 김수기 선생은 박봉을 쪼개어 5전이 아닌 매월 2원을 손기정의 특별급식비로 내놓았고 손기정은 당시 한그릇에 10전 이던 설렁탕을 매주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그 이후 김수기 선생은 손기정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손기정은 부모가 생명을 주었다면 김수기 선생은 그를 방황하지 않고 바른길로 인도하여 마라토너로 길러준 분이라 회상한다. 김수기 선생은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후 감사의 선물로 넥타이를 사다드린지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다.
마라토너로서 의지를 심어준 권태하 선수
1932년 LA올림픽대회 일본의 대표 선발전에서 권태하가1위, 김은배가 2위를 했지만 조선인이 우승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일본선수단의 농간으로 두 선수는 3위인 쓰다선수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맡게 되었다. 쓰다도 5위에 그쳤다. 일본의 농간에 지친 권태하는 달리기를 포기하면서 손기정에게 편지를 보내‘나는 더 이상 달리기를 하기에는 늦은감이 있어 포기하지만 뛰어난 자질을 가진 손기정은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일본의 코를 납작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그 이후에도 수시로 편지를 보내어 격려하였으며 많은 세월동안 손기정을 후원하였다. 손기정은 가장 감사한 선배로 권태하, 김은배 두 사람을 꼽는다.손기정은 1933년 10월에 열린 조선신궁경기대회 마라톤대회에 첫 출전하여 2시간 29분 34초 4, 이듬 해에는 2시간 24분 51초 2의 비공인 세계최고기록을 수립하며 완전한 마라토너로서의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대회 일본 후보 선발전에서 2시간 26분 14초로 1위에 오르자 동아일보 등 민족신문들이 대서특필하여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는 조선인들의 희망이 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하며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지만 도리어 조선인들의 동요를 우려한 총독부의 요주의 인물이 되어 귀국 후에는 제대로된 환영식조차 열리지 못했다.
조선마라톤 보급회를 설립하여 서윤복 선수를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자로 양성
손기정은 1945년 9월 23일에 권태하 선배의 작은 사무실에서 조선마라톤보급회를 설립하고 그의 집에서 마라톤 유망주들을 숙식시키며 훈련을 시작했다. 가장 빼어난 인재는 서윤복이었다. 본래 중장거리 선수였지만 풀코스를 두어 번 뛰더니 2시간 39분대로 국내 선수권을 차지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마침 베를린올림픽에 같이 출전했던 미국 선수 존 켈리(John Kelly)로부터 연락이 왔다. 존 켈리는 당시 우승자인 손기정의 마라톤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 신발을 얻어갔다. 그리고 그가 준 운동화의 신통력으로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기쁨과 감사의 뜻을 적은 엽서였다.
그 일을 계기로 손기정은 보스턴대회에 출전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미군정청의 협조로 보스턴마라톤대회 조직위원회로부터 초청장을 받게되었다. 단거리 육상선수 출신인 미국인 공보관 브래들리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대회 우승자였던 손기정을 기억하고 도움을 주었으며 미군정청 장교들도 십시일반 경비를 모금하여 3,000달러의 여비도 마련해주었다.
손기정의 선배인 남승룡도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출전했다. 서윤복을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서윤복은 28Km지점에서 갑자기 개가 뛰어들어 훼방을 놓는 바람에 페이스를 놓치고 선두를 쫓아가면서 32Km지점에서 마의 고개 하트브레이크 힐 (Heart break Hill)을 만났다. 평소 정릉골짜기에서 삼청공원으로 북악꼭대기를 뛰어오르며 체력을 길러온 서윤복은 모두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마의 고개 중반에서 선두로 나섰지만 이번에는38Km지점에서 운동화끈이 풀어지기 시작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서윤복은 꾀를 내어 관중이 들고 있는 물통을 신발에 부어 물에 젖은 끈이 다시 풀어지지 않게하며 마침내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을 했다. 손기정은 당당히 태극기를 앞에 달고 우승한 서윤복이 그렇게 부러웠다.
한국마라톤을 부흥한 주자 이창훈
1953년 전란이 끝나자 전국을 다니며 인재발굴에 나선 손기정은 대구에서 영남중에 다니던 이창훈의 소질에 놀라 그를 양정으로 데리고와 집에서 숙식을 시키며 사비를 털어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다. 1958년 5월 일본이냐 한국이냐로 마라톤의 우월을 가리는 대결인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가 동경에서 열렸다. 이창훈은 골인점인 메인스타디움을 돌 무렵에는 두 눈이 감기다시피 할 정도로 지쳐 결승 테이프를 몸에 감은채 쓰러졌다. 더위, 피로, 그동안 침체된 한국마라톤의 부흥에 대한 책임감으로 생사가 걸린 싸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2시간 32분 55초로 우승한 이창훈은 15분이나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창훈은 그 이후 각종 국제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하며 한동안 침체에 빠진 한국마라톤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이창훈은 1963년 1월 20일 손기정의 사위가 되었다. 손기정의 집에서 3년간 숙식을 하면서 중앙대 동문인 손기정의 딸 문명과 쉽게 친해 진듯했다.
손기정은 꿈에 그리던 태극기가 달린 옷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의 성화봉송 마지막주자로 달렸다.
윤형돈 운을 부르는 인맥관리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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