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대망상증 환자’ 조롱 받았지만…10년 만에 메모리 1위 기업으로
삼성은 지난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지만, 별다른 실적을 내지 못했다. 반도체 산업은 첨단 기술력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반도체는 지금과 달리 생산 원가에도 못 미치는 선에서 거래가 이루어져 적자 산업으로 여겨졌다.이병철 회장의 ‘도쿄선언’은 당시 많은 업계 관계자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았다. 미국 인텔은 이 회장은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표현했고, 당시 반도체 시장을 주도한 일본은 ‘한국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라는 칼럼도 내놨다.
당시 가전제품용 고밀도집적회로(LSI)도 겨우 만들던 삼성전자가 첨단 산업인 반도체에 뛰어든다니 그들에겐 웃길만한 일이었다. 한국 정부마저도 이병철 회장의 선언에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병철 회장은 경기도 기흥에 반도체 공장을 세우고, 미국 마이크론과 일본 샤프에서 반도체 기초 기술을 배웠다. 같은 해 삼성은 전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RAM)을 개발했다. 이때 개발한 64K D램은 30년 뒤인 2013년 산업 역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의미심장한 제품이었다.
1987년 이건희 회장 취임 직후 그룹 수뇌부가 이 회장에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자고 건의했다. 이 회장은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겠냐.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에 삼성이 나서겠다”며 반도체 사업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러한 삼성의 노력은 1992년 빛을 발하게 된다. 당시 삼성은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해 글로벌 시장에 앞선 기술력을 인정 받았다. 그해 12월엔 처음으로 D램 시장 점유율 세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92년 이후 30년간 삼성은 단 한번도 메모리 점유율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2017년엔 삼성은 인텔을 제치고 처음으로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반도체 세계 1위 기업이 됐다.
위태로운 반도체 사업…14년 만에 분기 영업손 전망도
그러나 최근 삼성의 주력사업인 반도체가 심상치 않다. 메모리와 시스템 모두 앞선 기술력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적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위태롭다. 특히 지난해 4분기의 경우 영업이익 2700억원을 기록하며 겨우 적자를 면했다.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부별 구체적인 실적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업계에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가 역대 최고 실적을 낸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고려하면 주력 사업인 메모리는 적자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삼성은 메모리에 이어 시스템반도체 1등을 목표로 사업을 키우고 있다. 앞서 삼성전자는 지난 2019년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을 통해 오는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해 시스템반도체 1위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2021년에는 38조원을 추가로 투자해 총 171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스템반도체, 그중에서도 최근 각광받고 있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의 경우 1위인 TSMC와의 격차는 점차 벌어지고 있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TSMC가 56.1%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삼성전자는 점유율 15.5%로 2위를 유지했다.
메모리 불황은 올 상반기 더욱 악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1분기에도 고객사 재고 조정이 이어져 메모리 가격 하락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증권가에선 삼성전자의 1분기 반도체(DS) 부문이 적자를 기록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만일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이 올 1분기 적자를 기록한다면, 2009년 1분기 이후 14년 만에 적자 전환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기술경영'…"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 키우자"
이러한 위기 속 업계에선 이재용닫기이재용광고보고 기사보기 회장의 위기 극복 방안에 주목하고 있다. 그간 이 회장은 줄곧 ‘기술 경영’을 강조해왔다. 최근 반도체 기술 개발이 나노 단위로 초미세화되면서 발전 속도가 이전보다 더뎌졌다. 경쟁사의 추격도 거세다.
이 회장도 지난해 10월 회장 취임 소회에서 “안타깝게도 지난 몇년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새로운 분야를 선도하지 못했고, 기존 시장에서는 추격자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며 위기감을 표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이 택한 것은 기술 초격차다. 앞선 기술력으로 미래 시장을 발 빠르게 선점해야 한다는 구상이다.
이 회장은 전날(7일)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캠퍼스를 찾아 “끊임없이 혁신하고 선제적으로 투자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을 키우자”며 미래 핵심 기술력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회장은 지난해 6월 12일간의 유럽 출장을 마친 귀국길에서 “시장에 여러 가지 혼돈, 변화, 불확실성이 많다”라며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하겠다”라며 기술 경영을 강조해왔다.
이 회장은 지난해 8월 복권 후 첫 공식 행보로 기흥캠퍼스에서 열린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R&D) 기공식에 참석해 "40년 전 반도체 공장을 짓기 위해 첫 삽을 뜬 기흥사업장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라며 "차세대뿐만 아니라 차차세대 제품에 대한 과감한 R&D 투자가 없었다면 오늘의 삼성 반도체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술 중시, 선행 투자의 전통을 이어 나가자. 세상에 없는 기술로 미래를 만들자"고 강조했다.
우선 삼성은 여느 메모리 기업들과 달리 ‘인위적 감산’은 없다는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오히려 투자를 강화해 올 하반기 반등이 예상되는 시점에 시장 지배력을 공고히 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는 2000년대 후반 메모리 반도체 치킨게임 속 ‘골든 프라이스’ 전략에서 얻은 교훈이다.
김재준 삼성전자 DS부문 부사장은 지난달 31일 열린 4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설비투자는 전년도와 유사한 수준이 될 것”이라며 “현재 시황 약세가 당장의 실적에 우호적이지는 않지만 미래를 철저히 대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중장기 수요 대응을 위한 인프라 투자를 지속해 필수 클린룸을 확보하려 한다”고 말했다.
파운드리의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는 한편 신규 고객 수주 확대에 집중할 계획이다. 삼성전자 측은 “차세대 GAA 공정 경쟁력을 바탕으로 3나노 2세대 공정의 신규 고객 수주를 확대하고, 2나노 1세대 개발에 집중해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정은경 기자 ek7869@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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