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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 Hobby] 인상주의를 빼놓고는 현대미술을 논하지 말라!

기사입력 : 2020-06-0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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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정수아트센터 관장] 고흐, 고갱, 세잔, 르느와르 등은 미술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는 화가들이다. 텔레비전 홈쇼핑에서도 이들의 포스터나 아트상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들의 그림을 좋아하고 집에 장식해두고 싶어하기 때문에 판매에 열을 올린다. 왜 유독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선호할까.

아마도 정치, 종교, 사회, 법률 등에서 자유롭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과거 독재군사정권 시절에도 좋은 예술이라고 교육한 것에 기인할 지 모른다.

그러한 교육풍토에 곁들여 미술사를 논할 때 현대미술은 그 시작을 인상주의를 기점으로 삼는다.

반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우리들 감정의 보고

예술장르에서 ‘현대’라는 말은 인간 중심의 사고영역이 표현으로서 종교적 신화적 영향에서 벗어나 인간의 것으로 자리 잡은 일종의 신사고적 경향의 것이기 때문이다.

인상주의가 절정에 달하는 1870년대를 지나 1890년대에 이르면 이전까지 금기시 되어왔던 인간의 감정 표현에 대한 욕망이 인상주의자들에게 침투되기 시작한다.

‘그 사람 인상 별로 안 좋아’ 혹은 ‘그 사람 본 소감이 어때’라고 할 때 ‘인상’이나 ‘소감’을 의미하는 것이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본래적 의미이다.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새로운 경향을 추구하는 작가들의 전람회를 취재하던 샤리바리(Le Charivari; 1832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신문)의 기자 Louis Leroy가 모네의 작품 ‘인상-해돋이’를 보고 ‘사물의 본질은 없고 인상만 있다’고 기고한 것에서 출발한다.

종교적 가치의 신이 등장하는 풍경에서 인간이 등장하는 풍경으로, 귀족이나 봉건영주의 무용담을 담은 기록화에서 신흥 부유층의 실재적 생활상으로 옮겨감을 의미한다.

때문에 당시의 인상주의 미술은 일종의 반사회적이며, 혁명적 상황으로 보였을 것이다.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 미술은 1860년대를 기점으로 프랑스에서 시작된 미술의 새로운 시도 중의 하나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통한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영향으로 미술은 종교나 국왕, 귀족의 품에서 벗어나게 된다.

지도층의 품에서 벗어났다기보다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돈이 있는 이들의 계층이 달라졌다고 봄직하다.

신흥 부르주아 계층이 미술의 새로운 후원자로 등장하면서 이들의 역동적인 생활상과 여가활동이 미술의 주요 소재가 된 것이다.

과학문명의 태동으로 인상주의의 시작은 사진기 발명과 때를 같이한다. 역사에 대한 기록이라는 세계를 사진에 넘겨줌으로 해서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했음도 한몫을 차지했다.

현실에 대한 호응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닌 직접 보고 체험하면서 화가의 개인적 감성이 포함되는 미술이 태동한 것이다. 자연의 모방이 아닌 조형적 입장에서 형태나 색채의 자유로움을 구현했고, 과학의 발전에 따른 분석과 경험을 중시했던 것이다.

사진의 발명은 화가들이 그림 그리기 편리하기 위해 어두운 상자에 구멍을 뚫어 상을 투영시킨 후 그것을 따라 그리던 옵스큐라를 시원으로 한다.

이후에 1839년 사진기가 발명되고 점차 진화됐지만, 사진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수단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화가와 애호가들은 사진술의 발명에 열광하기도 했으나 인물을 그리거나 사회의 어떠한 사건을 그림으로 그리던 시대에 사진의 출현은 일시적으로 화가들에게 많은 혼란을 제공했다.

프랑스 화가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는 사진에 대해 ‘이제는 회화는 죽었다’라고 할 정도로 충격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당시의 현실로 본다면 사회적 지위를 말하는 초상화나 기록화 같은 것들이 사진으로 옮겨가게 되면 화가의 일감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반면, 세잔이나 드가, 피카소와 로트렉 등의 화가들은 사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성공한 화가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사회적 신분차이에 비싼 가격의 초상화를 제작하지 못하던 시절의 사진 발명은 대중들의 기호에 대대적인 환영을 받게 됨은 두말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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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화된 기준 없이 자유롭고 변화적인 인상주의만의 감각

현대미술을 이야기 할 때 세잔을 빼놓을 수 없다. 세잔은 사과를 많이 그린 화가이면서 자신이 포착한 것을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을 “구현한다(realiser)”라는 말로 표현한 인상주의의 주요 예술가이다.

미술 비평가이자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인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 1870-1943)는 세계를 변화시킨 세 개의 사과를 이야기하는데 첫 번째가 이브의 사과이며, 두 번째가 뉴튼의 사과, 세 번째로 세잔의 사과를 꼽았다.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사과를 그릴 때 놓인 상태를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과의 배치와 색상, 눈높이 들을 화가의 입장에서 자유롭게 만들기 시작했다.

신의 영역으로서 자연만물에 대해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고 제작하는 새로운 사회구조의 변화를 예견한 것이다. 만일 모리스 드니가 더 오랫동안 살았더라면 스티브 잡스의 사과도 거론 했을지 모른다.

인상주의(Impressionism) 예술은 색채와 빛의 회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1860년 초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1874년 모네와 르느와르 세잔 피사로 등이 모여 심사 없는 전시로 절정으로 이루다가 1886년 8회 인상파 전시를 끝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접는다.

인상주의의 공식활동은 막을 내리지만 이후에도 지속적은 작품들은 여전히 등장한다. 종교적 관념이 지배적인 그림의 원근법과 고전적 균형이, 이상적 인물과 명암 등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변화적인 감각을 중요시 여겼다.

특히, 표현주의의 아버지로 칭송되기도 하는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네덜란드의 화가 혹은 불멸의 화가, 평생 가난하게 살다간 화가 등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너무나 많다.

그만큼 우리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화가로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목회자 활동을 하다가 화랑에서 일을 하고,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권총으로 자살한 비운의 화가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그림을 많이 알고 있지 않다. 10년 동안 900여작품들과 1,100여점의 습작을 남겼다.

보통의 사람들은 고흐 작품이라 알고 있는 것이 많게는 20여점에 불과할 것이다. 돈으로 보자면 1990년 고흐의 ‘의사 가세의 초상’이 8,250만달러(약 900억)로 일본인에게 낙찰된 기록도 가지고 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수련도 있다. 1919년 작품 ‘수련(Le bassin aux nympheas’’이 2008년 6월 영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4092만 파운드(약832억원)에 낙찰되었다.

인상주의는 더 세분화해서 후기인상주의, 신인상주의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인상주의는 종교적 신념이 없이 인간 스스로가 바라보는 자연풍경이나 사람을 그린 것이며, 후기 인상주의는 고갱이나 고흐와 같이 풍경이나 인물 속에 개인의 감성과 감정이 스며든 것을 의미한다.

감정과 인간관계가 가미된 작품 등을 후기 인상주의라 한다. 여기에 인상주의 이론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프리즘을 통해 알게 된 과학을 가미하여 빛을 분석하거나 하는 등의 효과를 표현한 것이 신인상주의이다.

※ 본 기사는 한국금융신문에서 발행하는 '재테크 전문 매거진<웰스매니지먼트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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