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에 몸 담고 있는 한 주식 투자자는 최근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안 그래도 여건이 좋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 재료가 투자심리를 더 짓눌렀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의 실적과 경제지표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식시장이 이미 상당 부분 악재를 반영해 놓은 상태라고 판단하는 사람 역시 많았다.
하지만 여기에 일본 재료가 끼어들어 적정 주가지수를 얼마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사안 중 하나는 일본이 반도체 관련 '3품목' 외에 추가적으로 규제를 확대하는 것이다.
지금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하고 규제 대상 품목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타격을 입지만, 한국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이란 관측들이 많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한국과 일본당국자들은 이번주 일본에서 수출 규제 문제 해결을 위해 논의에 나설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일본의 입장은 단호하다.
일본경제신문은 9일 아침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문재인 대통령의 규제철회를 협의하자는 제안에 대해 "협의대상이 아니며, 철회할 일도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보도했다.
스가 장관은 특히 이번 일에 대해 "수출 관리를 적정하게 실시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하는 것으로 일본 국내의 정책 운용에 관계된 사안"이라고 못박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국 수출 당국의 조치 시정 요구를 확인한 뒤 실무 레벨에서 이 문제를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안 그래도 위축된 국내 주식시장..일본 재료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
지난 주 금요일 미국의 고용지표 서프라이즈에 따른 금리인하 기대감 퇴조로 뉴욕 주가지수도 하락했다. 하지만 고용지표를 확인한 당일 뉴욕 주가지수 낙폭은 0.1~0.2%에 그쳤다.
이에 반해 전날 국내 주가지수들은 2% 이상 급락하면서 고꾸라졌다. 코스피지수는 46.42p(2.20%)나 급락해 2064.17로 떨어졌다.
코스닥은 상황이 더욱 안 좋았다. 코스닥지수는 25.45p(3.67%) 폭락한 668.72로 내려갔다. 코스닥은 연초의 연중 저점과 거리를 상당히 좁혀놓은 상황이다.
국내 주가지수가 하락한 데엔 연준의 금리인하 기대감 축소, 미중 무역분쟁 관련 잡음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국내 주가 낙폭이 미국에 비해 크게 두드러지는 데다 최근 국내 대부분의 경제지표가 부진을 보이는 와중에 일본발 재료까지 투자심리에 타격을 가했다는 평가들이 적지 않았다. 향후 불확실성도 크다.
A 운용사의 한 주식매니저는 "사실 이번 일본 이슈의 파급 효과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국내의 경우 소재의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커 그 영향을 쉽게 진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국내 주식시장 투자 환경이 좋지 않은 것은 모두가 알 것이다. 다만 순자산 가치 측면의 밸류에이션, 그간 소외된 수익률 등을 감안하면 이 수준에서 100p 더 올라도 비싸다고 하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하지만 일본과의 관계가 계속 악화된다면 100p 더 빠져도 할 말이 없다"면서 문제는 그 여파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라고 했다.
B 운용사 주식매니저도 "안 그래도 주식시장 여건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 무역제재라는 불확실 요인이 추가됐다"면서 "채권시장이 금리 레벨을 빼놓고는 모두 호재라고 하는데, 주식시장은 레벨 빼놓고 모두 악재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 일본의 공세..관심 가는 미국의 의중
일본은 이번 조치가 WTO 협정이나 국제법을 위반하는 사안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한국에 줬던 '특혜'를 거둬들이는 차원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댄다.
또 신뢰를 상실한 상대방 국가의 '무역 지위'를 조정하는 것은 일본 내부의 문제라고 못박고 있다.
다만 '정상국가'를 지향하는 일본이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미국이다. 이번 사태는 또 한일 양국 기업 뿐만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미국도 중간에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
주식시장 입장에서 일본이 이렇게까지 경제보복을 강조하고 나온 적이 없기 때문에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일본 관련 불확실성이 주식시장의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면서 "주식시장이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과거에 일본이 이런 적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오는 21일 참의원 선거 이후에 다소 입장이 완화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번 일은 아베정권의 우경화와 그 본심이 드러난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면서 "다만 앞으로는 일본의 의도가 아니라 미국의 의도가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미국에 대해 'NO'를 해 본 사례가 없으며, 이 사안을 미중 대립과 떼서 보기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김 센터장은 "미국은 중국 봉쇄를 위한 인도-태평양 블록에 한국도 들어오길 바라고 있다. 그런데 아베 정부의 이번 조치는 위안부 문제 대응보다 더 큰 강공으로 볼 수 있다"면서 "이런 일이 미국의 의도에 부합하느냐가 중요하고 향후 미국의 중재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까지 한일 갈등이 심화될 때 주한 미대사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참의원 선거 전까지 아베 정권이 내셔널리즘을 자극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금융시장이 이 사태의 평가와 관련해 어느 정도 합의를 볼 수 있다는 견해다.
아무튼 미국 입장에선 이미 아시아의 강력한 패권국가가 된 중국과 대치전선을 견고하게 만들어야 하는 상항이다. 자신들이 구상한 틀 내에서 움직여야 할 중요한 '말'인 한국과 일본이 서로 으르릉대는 구도를 부담스러워 할 수 있다.
아울러 일본의 한국 기업들에 대한 부품 규제는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이나 자본의 분업 구조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글로벌 경제의 가치 사슬엔 한일 기업만이나 아니라 애플 등 다양한 미국기업들도 얽혀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의 치밀한 공격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미국이 당장 적극적으로 나설지 의문이라는 진단도 엿보인다. 치밀한 일본과 그렇지 못한 한국의 대응을 감안해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태의 본질은 한국경제가 약해진 틈을 이용해 일본이 우리 경제에 카운터 펀치를 먹이려는 것"이라며 "우리가 취약해진 틈을 이용해 주력 산업에 타격을 입히면서 다시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전략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그는 "이 일과 관련해 일본이 미국 상층부와 의견 조율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그간 일본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대응은 포퓰리즘적이었고 안일했던 측면도 크다"고 비판했다.
■ 주식시장의 위축된 심리..일본사태 불확실성 길어질 가능성도
주식시장의 투자심리가 상당히 냉각돼 있다. 미국 금리인하 기대감 둔화를 한국이 미국보다 더 긴장을 해야 할 정도라는 평가도 있다. 여기에 일본의 공세가 얹혀진 상황이다.
C 운용사의 한 주식매니저는 "미국 금리인하 기대감 약화에 일본발 무역규제 노이즈에 주식시장이 겁을 먹은 상황"이라며 "일단은 수요일 파월 연준 의장의 발언을 확인한 뒤 시장이 분위기 전환 여부를 꾀할 듯하다"고 평가했다.
아무튼 한일 갈등이 해소되지 않을 경우 1분기 정도 뒤의 시점부터 '일본 사태에 따른 경기둔화'라는 경기둔화 재료가 추가될 수 있다는 우려들도 보인다.
반도체 관련 재고 얼추 3개월분 보유 등을 감안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여파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또 일본이 8월에 한국을 우호국에서 제외시킨 뒤 여타 품목에 대해 계속해서 제재를 걸어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KB증권 경제분석팀은 5일자 보고서에서 "반도체 수출의 규모가 국내총생산의 약 6% 내외를 차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의 제재가 지속돼 그 여파로 수출물량이 10% 감소할 경우 경제성장률이 0.6%p 가량 하락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 증권사 이코노미스트들은 "일본이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할 경우 추가적인 소재 및 부품의 수입이 어려워질 수 있어 2019년 하반기, 특히 4분기 이후의 생산 및 수출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장태민 기자 chang@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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