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금융 이사회는 지난달 23일 KB금융 노조가 신청한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를 사외이사로 추천하는 안건을 주총 안건으로 상정했다. 다른 금융지주사 노조도 사외이사 후보를 물색하고 있는 가운데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안건을 찬성한다면 노조추천 사외이사 도입이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KB금융 노조는 지난해 11월 임시주총에서 하승수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추천했다. 당시 해당 안건은 주총 참석 주주의 찬성률 과반을 넘지 못한 17.78%에 그쳐 부결된 바 있다.
17%의 찬성률은 노조가 추천한 다른 안건 찬성률과 비교한다면 적은 수준이 아니다. 당시 KB노조가 신청한 또 다른 안건(현직 대표이사 회장을 모든 소위원회 활동에서 배제하라는 정관변경안)은 7.61%의 득표에 그쳤다.
주총 이후 국민연금은 의결권 자문기관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CGS)이 '찬성' 권고를 한 데 영향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CGS는 KB금융 사외이사 안건에 대해 반대 권고를 했다고 시장에 밝힌 이후였다.
국민연금과 CGS의 엇박자는 국민연금의 독특한 기준 때문에 생겨났다. 국민연금은 연금이 지분을 가진 기업의 사외이사 안건을 심사하는 별도의 기준을 갖고 있다. 지난 KB금융 사외이사 건에 대해서도 연금은 CGS에 하승수 후보가 자체 기준에 부합하는지만 판단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KB금융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사추위)가 후보 검증을 끝내고 주총 안건으로 채택한 이후이므로 별도의 부적격 사유가 발견될 여지는 없었다.
국민연금의 이러한 행보는 현 정권의 기조를 의식한 데서 나온 것이란 해석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국민연금은 대부분 금융회사의 단일 최대주주이지만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기는 어렵다"며 "현직 대통령의 공약이 노동이사제 도입이기도 했고, 연초 금융위 금융행정혁신위원회에서 금융회사에 근로자 이사제 도입 검토를 권고하기도 했으니 눈치를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 하나·신한·우리, 이번엔 빠지지만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사외이사 의결 공식이 지난해와 달라진 게 없다면, KB금융뿐만 아니라 다른 금융지주사 및 은행의 노조추천 이사제 도입에 힘을 싣는 상황이 될 수 있다.
국민연금은 신한금융(9.55%), 하나금융(9.61%), 우리은행(9.45%), 기업은행(9.21%)의 지분을 상당수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국민연금의 영향을 받는 자산운용사들까지 가세한다면, 노조추천 사외이사 안건은 최대 10% 이상의 찬성표를 확보하게 된다.
금융지주사 및 은행 노조는 현재 하나금융을 제외하곤 사외이사 추천을 다음 주총 안건으로 신청할 계획을 갖고 있다.
신한금융 노조는 적당한 인물을 선발하지 못해 사외이사 추천을 다음 주총으로 연기했다. 우리은행 노조는 지난해 말 KB금융에 발맞춰 안건 신청을 해두었지만, 정부 잔여지분 매각과 지주사 전환을 추진한 뒤 노조추천 사외이사제 도입을 추진할 계획이다. IBK기업은행은 올 2분기 노사협의회 안건으로 상정할 예정이다. 하나금융 노조는 회장 연임 반대에만 주력하고 있고 사외이사 추천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들 노조가 고민하는 것은 외국인 주주의 표심이다. KB금융 노조가 지난해 주총에서 실패한 원인은 외국인 의결권 자문기관인 ISS가 반대권고를 했기 때문이다. KB금융 지분에서 외국인 주주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69.61%에 달한다. 이들은 ISS 권고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KB노조는 이번에 ISS에 안건 정당성을 피력하기 위해 직접 찾아갈 계획을 갖고 있다. ISS의 KB금융 주총 안건에 대한 찬반은 3월 둘째주 드러날 예정이다. 또한, KB노조는 이번에 정당 활동 이력이 없는 사외이사 후보를 선정함으로써 ISS가 반대 권고를 내릴 가능성을 좁혔다.
국내 의결권 자문사 관계자는 "한국의 자문기관은 노조추천 이사제를 '기업 가치의 훼손'이라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반대했다"면서 "ISS는 후보자의 자격 하나하나가 경영에 도움이 될지, 현직 사외이사의 이력과 중첩되지 않는지 등을 미시적으로 따졌다. ISS의 보고서를 확인한 이후 국내 지배구조 전문가들은 다소 놀랬다"고 말했다.
KB노조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권 후보자는 학술 외 활동으로는 행안부·기재부·고용노동부 등 정부 자문위원 활동, 참여연대·한국노총·금융노조 등 노사관계 기관에서 위원 활동을 했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CGS 기업지배구조연구위원으로 활동해왔다. 다만, 금융권에 따르면 해당 위원회는 활발한 활동을 하지 않는 조직으로 알려졌다.
◇ 노조 경영간섭 VS. 힘의 균형
금융권 노조추천 사외이사 도입에 대한 찬반양론은 극명하다. 찬성 측은 한국의 노사관계는 기울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사외이사 도입을 균형을 이룰 수단으로 여긴다. 반면, 반대 관점은 해당 사외이사가 선임될 시 노조와 경영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노조가 주요 경영사항에 간섭할 여지가 생기는 것을 우려한다.
윤석헌닫기윤석헌기사 모아보기 금융행정혁신위원장(서울대 경영학과 교수)은 "사외이사는 혜택이 비용보다 너무 크다"며 "이 문제를 개선할 수 없다면 (이사회에) 신선한 보이스를 가진 사람이 들어오게 하는 것이라도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 위원장은 국내에 근로자 추천 이사제와 노동이사제 중 어느 것이 먼저 도입되는 게 나은지를 묻자 "근로자 추천 이사제가 좀 더 포괄적"이라고 답했다. 그는 "노조원이나 외부 전문가 등 누구든 추천을 받을 수 있으므로 근로자 추천 이사제가 유연성이 있다"며 "초기에는 한국에 노동이사제보다 이렇게(근로자 추천 이사제로) 가는 게 괜찮다"고 평가했다.
익명을 요구한 지배구조 관련 학계 인사는 "노조추천 사외이사제 도입으로 기업가치가 훼손된다는 의미는 정보 유출을 의미한다. 관련 사례가 독일에서 발견됐다"면서 "이사회 내 소위원회에서 해당 사외이사가 활동한다면, 자신을 사외이사로 만들어준 노조에 경영과 관련된 주요 논의 사항을 유출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게 만약 임금이나 KPI(핵심성과지표) 관련된 부분이라면, 확정되지 않은 사안에 노조가 반감을 갖고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크다"면서 "사추위, 지배위, 감사위 등 어느 위원회에 해당 사외이사를 배치할 지도 지주사로서는 고민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혜린 기자 hrgu@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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