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 1992

대한민국 최고 금융경제지

닫기
한국금융신문 facebook 한국금융신문 naverblog 한국금융신문 instagram 한국금융신문 youtube 한국금융신문 newsletter 한국금융신문 threads

반도체 호황에 가려진 韓 제조업 ‘점진적 축소’ 경고음

기사입력 : 2026-09-15 09:53

  • kakao share
  • facebook share
  • telegram share
  • twitter share
  • clipboard copy

ITIF ‘한국 산업경쟁력 보고서’ 진단·제안
AI 메모리 착시 넘어 산업체질 개혁해야
초격차 R&D·성과연동형 정책 재편 시급
‘규모의 중국’ 맞설 한·일 공급망 연대도

[한국금융신문 장종회 기자] 글로벌 인공지능(AI) 열풍에 힘입어 한국 경제가 다시 ‘반도체 착시’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주도하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실적 호조에 수출까지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면서 제조업 위기론이 잦아드는 모양새다.

하지만 미국 워싱턴 D.C.에 본부를 둔 글로벌 기술정책 싱크탱크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이 최근 발간한 ‘한국 산업경쟁력 보고서(How South Korea Can Turn Its AI-Memory Boom Into Systemic Strength in the Face of China’s Scale Pressure)’는 낙관하기 어려운 현실을 짚고 있다.

보고서는 한국 경제가 단기간에 급격히 붕괴하지는 않더라도 핵심 첨단산업 기반이 점진적으로 위축되는 ‘구조적 축소(Systemic Narrowing)’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AI 메모리의 기술적 우위만으로 산업 생태계 전체의 경쟁력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로버트 앳킨슨 ITIF 회장과 함께 보고서를 집필한 김세진 정책연구원은 “한국이 AI 메모리의 기술적 우위를 유지하더라도 이를 뒷받침하는 소재·장비·부품 시장을 중국에 점차 내줄 수 있다”며 “반도체 호황을 다음 세대 기술과 산업 전반의 경쟁력에 투자할 기회로 보고 미래대응기금과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 3대 메가프로젝트를 구체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호황에 가려진 韓 제조업 ‘점진적 축소’ 경고음이미지 확대보기

반도체 쏠림과 ‘중국발 규모의 압박’

ITIF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첨단산업 경쟁력을 평가하기 위해 ITIF가 집계하는 ‘해밀턴 지수(Hamilton Index)’를 기준으로 10개 핵심 전략산업이 2022년 한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1%(부가가치 창출액 4204억 달러)에 달했다. 글로벌 평균 대비 산업 특화도를 나타내는 입지계수(LQ)는 2.17로 ITIF가 비교 분석한 39개국 가운데 대만(2.63)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반도체뿐 아니라 전기장비(LQ 2.68), 자동차(LQ 2.33), 화학(LQ 2.16), 일반기계(LQ 2.02) 등 제조업 전반에 걸쳐 촘촘한 공급망을 구축한 ‘첨단제조업 강국’으로 평가된다.

다만 이런 산업적 강점이 오히려 함정이 될 수 있다는 게 ITIF의 지적이다. 한국이 강점을 가진 분야가 중국이 국가 차원에서 집중 육성·확장하는 산업과 상당 부분 겹치기 때문이다. 2018~2022년 10대 첨단산업에서 중국이 늘린 부가가치 생산액은 6115억 달러에 달했지만 한국의 증가액은 74억 달러에 그쳤다. 특히 컴퓨터·전자산업에서 한국의 부가가치 생산은 110억 달러 감소한 반면 중국은 226억 달러 증가했다.

올해 들어 한국의 수출 지표는 뚜렷한 회복세를 나타냈다. 올해 1~7월 한국의 총수출 증가분 가운데 약 73%가 반도체 한 품목에서 발생했다. 반도체를 제외한 다른 산업의 회복세는 상대적으로 미진하다. 반도체 호황이 이어지는 동안 다른 산업의 기술력과 공급기업도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정책을 재설계해야 하는 이유다.

중국은 완성품 시장을 넘어 중간재·생산설비·첨단소재 분야까지 대규모 보조금과 거대한 내수시장을 앞세워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결국 한국이 AI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1위의 기술 경쟁력을 유지하더라도 메모리를 만드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와 다운스트림 산업 기반이 중국의 ‘규모의 압박(Scale Pressure)’에 잠식될 수 있는 구조적 위기에 놓인 셈이다.
반도체 호황에 가려진 韓 제조업 ‘점진적 축소’ 경고음이미지 확대보기

韓 3대 메가프로젝트와 미래대응기금의 성공 조건

이재명 정부는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를 아우르는 ‘3대 메가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반도체 호황으로 창출되는 세수를 활용해 ‘미래대응기금(Future Response Fund)’을 조성하고 이를 사업 재원으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반도체 신규 공장(Fab) 건설, 충청권 HBM 및 첨단 패키징 거점 구축, 18.4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 확충 등이 추진되고 있다.

ITIF 보고서는 이 같은 계획에 대해 “투자 총액이 성공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단순히 대규모 펀드를 조성하고 공장을 짓는 것만으로는 ‘시스템 전체의 체력’을 강화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민간기업이 자발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단순 설비투자에 재정을 지원하거나, 보증 위주의 연명식 중소기업 지원에 자금을 투입하는 방식은 자금 집행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ITIF는 기존 지원 방식에서 벗어나 정책자금을 시스템 경쟁력 강화로 연결하기 위해 ‘성과 조건부 지원 기준’을 설정하고 메가프로젝트와 산업투자에 적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검증된 생산성과 수출 성과를 지원과 연동하라는 것이다. 국가 R&D 및 미래대응기금의 산업투자 지원을 단순한 기술개발 달성률이 아니라 글로벌 선도 고객사의 성능 검증(Qualification) 통과, 수주 실적, 생산성 향상, 대중국 공급망 의존도 완화 등의 성과와 직접 연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ITIF는 또 AI 데이터센터를 국내 산업 생태계의 실증 무대로 활용할 것을 제시했다. 대규모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단순한 시설 확충에 그치게 하지 말고 국내 NPU(신경망처리장치), 전력장비, 액체냉각 솔루션,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실제 상용 운영 환경에서 트랙레코드(Track Record)를 쌓고 해외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국가 대표 테스트베드’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ITIF는 피지컬 AI(Robotics) 확산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제조 현장에 로봇과 AI 기술을 접목하는 M.AX(제조 AI 전환) 프로젝트처럼 실제 공장의 생산성을 높이고 불량률을 낮추는 구체적인 성과를 기준으로 정책을 집행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반도체 호황에 가려진 韓 제조업 ‘점진적 축소’ 경고음이미지 확대보기

세계 최초 ‘초격차 혁신’과 R&D 조세제도 개편

중국이 추격자를 넘어 독자적인 첨단기술을 대규모로 상용화하는 단계에 진입한 만큼 한국의 생존전략은 세계 최초 수준의 ‘초격차 혁신’에 달려 있다는 게 ITIF의 진단이다. 보고서는 대기업에 대한 일반 R&D 세액공제 제도를 획기적으로 확대하고 안정화해야 초격차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현재 한국의 일반 R&D 세액공제율은 중소기업 25%, 중견기업 8%인 데 비해 대기업은 최고 2% 수준에 불과하다. 대규모 원천기술과 차세대 상용화 연구를 주도할 대기업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세제 구조가 대규모 R&D 투자 유인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급효과가 크고 실패 위험이 높은 첨단 분야에 대해서는 기업 규모와 관계없이 파격적인 세제 혜택이 필요하다는 게 ITIF의 분석이다.

동시에 정부 지원금 정책도 체질을 바꿔야 한다고 ITIF는 진단한다. 성과가 미진하거나 중소기업 보호를 명분으로 경쟁력을 잃은 기업을 연명시키는 지원 프로그램은 과감히 정비하고, 중견·대기업으로 도약할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집중하는 ‘성장 연동형 지원 체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것. 한계산업의 한계기업을 연명시키기보다 근로자 전직훈련과 지역 산업시설 재활용 지원 등을 통해 구조조정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반도체 호황에 가려진 韓 제조업 ‘점진적 축소’ 경고음이미지 확대보기

한·일 공급망 동맹과 우방국 연대 필요

한국 혼자 힘으로는 14억 인구와 막대한 국가 보조금을 투입하는 중국의 ‘규모의 경제’에 맞서기 어렵다. 보고서는 핵심 외교·산업 전략으로 ‘동맹국 결합(Allied Scale)’ 구축을 제안했다. ITIF가 제시한 출발점은 한·일 공급망 연대(Korea-Japan Supply Chain Partnership)다.

한·일 간에는 역사적 갈등이 존재하지만 산업적 실리 차원에서 한국의 반도체·전자 제조 기반과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원천기술을 결합하는 것이 중국에 대응하기 위한 선택지가 아니라 필수에 가깝다는 것이다.

지난 2022년 기준 컴퓨터·전자산업 부가가치 생산은 한국(1336억 달러)이 일본(697억 달러)을 앞선다. 반면 일반기계·장비에서는 일본(1304억 달러)이 한국(424억 달러)을 크게 앞선다. 두 부문에서 한·일 양국의 생산액을 합치면 기계·장비 분야에서 중국(4301억 달러)과의 격차를 10배에서 2.5배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이다.

여기에 미국, 유럽연합(EU) 등 우방국과 함께 중국의 비시장적 보조금과 불공정한 기술 획득 공세에 공동 대응하는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다. 제3국 시장에 진출할 때 공동 수출금융과 통상규범 연대를 통해 한국 기업이 불공정한 가격 경쟁으로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호황에 가려진 韓 제조업 ‘점진적 축소’ 경고음이미지 확대보기

AI 메모리 붐은 마지막 ‘골든타임’

한국 경제가 누리고 있는 지금의 AI 반도체 호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오히려 반도체 호황이 이어지는 지금이 한국의 산업 시스템 전반을 개조할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반도체 수출에 안주하다가는 메모리 제조업을 제외한 다른 산업 기반까지 중국에 잠식당해 ‘외로운 섬’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위기를 피하려면 한국 정부와 국회가 미래대응기금과 3대 메가프로젝트를 생산성·실증 상용화·글로벌 시장 검증 중심으로 철저히 재설계하고, 초격차 기술개발을 가로막는 세제와 규제의 걸림돌을 제거해야 한다는 ITIF의 지적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장종회 한국금융신문 기자 jhchang@fntimes.com

데일리 금융경제뉴스 Copyright ⓒ 한국금융신문 & FNTIMES.com

저작권법에 의거 상업적 목적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 금지

가장 핫한 경제 소식! 한국금융신문의 ‘추천뉴스’를 받아보세요~

issue
issue

경제·시사 BEST CL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