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이미 첫 단추를 꿰었다. 은행의 건전성 지표인 CET1(보통주자본비율)과 RWA(위험가중자산) 부담을 완화해 투자·대출 여력을 넓혔다. 부동산 대출은 조이고, 기업 대출에는 인센티브를 줘 자본의 흐름을 바꾸겠다는 시도다. 단순 규제 조정이 아니라 자원 배분 방식을 재설계하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이번 시도가 과거처럼 ‘데자뷔’로 끝날지, 아니면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체인저’가 될지는 미지수다. 규칙을 고치는 건 정부 몫이지만, 행동을 바꾸는 건 금융권과 현장의 몫이기 때문이다.
성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관치 리스크’와 ‘현장의 관성’이다. 국민성장펀드 등 전략산업 투자 구상은 긍정적이지만, 뉴딜펀드처럼 절차와 책임 구조가 허술하면 신뢰를 잃는다. 정책 자금이 민간을 끌어내는 마중물이 아니라 ‘정부 의존형 펀드’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다.

금융권도 양면 압력에 놓였다. 주주가치 제고와 생산적 금융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한다. CET1 규제 완화는 주주·당국·사회의 요구가 충돌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체질 개선 없이 단기 순응에 머문다면 변화는 껍데기에 그칠 수 있다.
현장의 현실은 더 냉정하다. 심사역들은 “규제가 완화돼도 책임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모험은 어렵다”고 말한다. 실패 부담이 개인에게 집중되고, 감독당국이 ‘위험을 져라’와 ‘왜 그랬느냐’를 동시에 요구하는 구조에서는 ‘안전한 선택’만 남는다. 평가·보상 체계와 책임 문화까지 바뀌어야 현장이 움직인다.
따라서 성패의 열쇠는 ‘신뢰’다. 제도는 일관성을 지켜야 하고, 금융사는 장기 비전을 갖고 투자해야 하며, 당국은 실패를 감내할 제도적 울타리를 마련해야 한다. 신뢰 없는 제도는 실적 채우기에 불과하다.
금융의 역할 재정립도 필요하다. 저출생·고령화·기후위기 같은 구조적 과제 앞에서 단순 대출만으로는 부족하다. 일본이 은행법 개정으로 벤처·지역재생 참여를 허용했듯, 한국 금융도 사회 변화에 맞는 새 틀을 마련해야 한다.

해외 사례도 분명한 교훈을 준다. 싱가포르 테마섹은 전통 산업 수익을 미래 산업에 재투자하며 정치적 간섭을 차단했다.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손실이 나더라도 원칙대로 운용해 신뢰를 쌓았다. 세계적 기업들도 초기 실패를 버틸 시간과 제도적 보호가 있었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
‘생산적 금융’이 체인저가 되려면 단기 성과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민간과 정부의 신뢰를 바탕으로, 현장을 움직이는 인센티브, 실패를 감내하는 제도, 예측 가능한 출구를 제공할 때 자본은 혁신으로 흐를 것이다.
부동산과 이자마진에 기댄 금융 모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는 구호가 아니라 금융권 스스로의 장기 비전과 사회적 역할 재정립이 절실하다. 진짜 시험대는 지금부터다.
김의석 한국금융신문 기자 eskim@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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