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행 고팍스 대표는 암호화폐에 모든 걸 걸었다. 비트코인을 접한 순간 세상을 바꿀 기술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래서 돌연 다니던 사모펀드 운용사를 그만두고 블록체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암호화폐 시장은 아직 걸음마를 생각조차 못하는 신생아와 같다. 이미 성숙한 시장인 주식시장과 비교하면 암호화폐의 현주소는 더욱 분명해진다. 증시에는 관련 행위를 아우르는 자본시장법이 존재한다. 개인투자자는 물론 기관과 외국인까지 다양한 소스로부터 자금이 유입한다. 선물과 각종 관련 파생상품이 풍부하다.
반면 암호화폐는 관련 법률과 제도 관련 파생상품이 없다. 시장을 지지해주는 대규모 기관 자금이 유입하지 않고 있으며 거래 주체는 대부분 개인투자자다.
이 대표는 “주식시장처럼 큰 시장에선 투자 경험이 풍부한 펀드나 기관 자금들이 들어와서 현물과 각종 파생상품을 다양한 형태로 거래한다”며 “이를 통해 적정 시장 가격을 수월하게 찾아간다고 할 수 있는데 암호화폐의 경우 모든 것이 열악해서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해킹 등 보안 문제는 국내 모든 암호화폐 거래소들이 당면한 만성 골칫거리다. 공격 주체는 북한 해커로 의심된다. 과거 국내 은행권을 노리던 북한 측 해커들은 최근 한국 암호화폐 거래소들로 주 타깃을 변경했다.
시장 자체가 미성숙한 만큼 업계를 바라보는 투자자들의 시선에도 아직은 의심이 가득하다.
거래소가 주도적으로 시세를 조종하는 것 아닌지, 혹은 간접적으로 시세 조작 세력을 눈감아주는 것 아닌지 등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이 대표는 그러나 대부분의 거래소에 상장돼 있고 지갑이 제공돼 투자자가 언제든 코인을 넣고 뺄 수 있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같은 주요 코인은 시세 조작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그는 “큰 코인은 현실적으로 시세 조종이 불가능하지만 지갑이 제공되지 않는 흔히 잡코인이라고 하는 작은 코인들은 소수의 투자자가 다량을 보유하고서 시세 조종을 하는 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거래소도 모두 같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고팍스를 예로 들면 우선 트레이딩 관련 룰이 있고 시세조종 의심 정황이 포착되면 해당 주체가 거래할 수 없게 조치한다”고 부연했다.
현재 블록체인 업계가 가장 큰 문제로 지목하는 건 암호화폐의 제도권 포섭이 지연되고 있는 점이다.
암호화폐가 하루빨리 제도권 울타리에 들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투자자 보호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암호화폐 규제와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업계가 투자자 보호를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이 대표는 “룰이 없다는 게 제일 힘들다”며 “업계가 할 일이 있고 정부가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암호화폐 거래소가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으로 효율적인 거래, 투명한 거래, 사회적 효용이 큰 자금 조달, 안전한 고객자산 보관, 불법자금 유통 방지, 블록체인 사용성 제고 등을 든다. 거래 효율성과 블록체인 사용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술력과 운영능력을 갖추는 건 거래소의 역할이다.
반면 불공정행위 규제와 불법자금 유통 방지, 사회적 자금 조달 등 조건이 확보되려면 정부의 법적 권한이나 정보력이 지원돼야 한다는 게 이 대표의 의견이다.
이 대표는 “증시에선 자본시장법이 불공정거래 등 불법행위를 막는 제도적 역할을 하는데 암호화폐는 그렇지 않다”며 “정부와 업계가 공조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 암호화폐 관련 불법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돈세탁이나 범죄에 쓰인 지갑 주소를 암호화해서 공유하면 효과적일 것”이라며 “하지만 암호화폐 관련 법이 없는 상황에 개인정보 등 여러 문제가 걸려 있어서 정부도 조심스러운 것 같다”고 말했다.
업계 입장에서 관련 제도 미비에 따른 불편을 가장 크게 체감하는 부분은 가상계좌 발급 문제다. 이 대표는 “어느 거래소에 가상계좌를 주고 안 줄지를 판가름할 기준 자체가 없다”며 “지금은 거래소의 시스템이나 보안이 어느 수준인지 실사해서 가상계좌 발급 여부를 정하는 게 아니라 은행들이 자의적으로 가상계좌를 줄지 안 줄지 정해 최소한의 업체에만 제공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가상계좌 발급 에 직접 관여하진 않지만 은행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블록체인이 성장할 산업이라는 건 정부와 산업계가 모두 동의하는 점이다. 그래서 이 대표는 지금의 규제 공백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작다고 믿는다. 업계에선 이미 협회를 중심으로 암호화폐 관련 규제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국회에서도 관심 있는 몇몇 의원을 중심으로 입법 움직임이 관측되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정부에서도 관심 있게 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성장 산업으로 인정한다면 당연히 관련 제도를 만들 것”이라며 “성장산업과 관련, 과소 규제의 리스크는 곧바로 현 당국에 부담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의 제도화는 시간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자신했다.
블록체인이란 용어와 ‘탈중앙화’라는 키워드는 항상 함께 한다. 하지만 이 대표는 탈중앙이 블록체인의 핵심 가치라고 보지 않는다. 다만 블록체인은 대중의 컨센서스를 쉽고 효율적으로 모을 수 있는 ‘소셜 테크놀로지’라고 강조한다.
이 대표는 “탈중앙은 블록체인의 속성 중 하나일 뿐, 블록체인의 핵심 가치는 컨센서스 머신으로서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며 “블록체인은 열린 상태에서 검열 없이 흩어져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 프로토콜이나 가치에 대한 동의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제공하게 하는 기술”이라고 정리했다.
때문에 100% 탈중앙화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강력한 중앙 집중 시스템이 필요한 부분이 있고 탈중앙을 지향해야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민주주의는 느리지만 시스템 실패가 적고 독재는 효율적이지만 부패하게 마련”이라며 “탈중앙이 꼭 필요한 영역은 중앙화된 현 시스템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분야”라고 지목했다.
이어 “구조적으로 투표시스템에 탈중앙화 시스템을 적용하면 좋을 것 같다”며 “조작 가능성, 막대한 비용 등 현 투표시스템에 내재된 문제가 블록체인을 적용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투자수단으로서 암호화폐를 고려하는 이들에게 이 대표는 유틸리티 토큰의 리스크를 잘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암호화폐를 크게 비트코인과 같은 통화로서의 코인과 각종 서비스 기반의 유틸리티 토큰, 증권형 토큰 등 3가지로 나눈다”며 “최근 주로 ICO를 하는 건 유틸리티 토큰인데 유틸리티 토큰 투자는 엔젤투자보다 더 위험한 투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유틸리티 토큰의 경우 해당 토큰이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가 언제까지나 흥할지 확신할 수 없다”며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암호화폐에 투자하려면 우선 내가 투자하려는 코인에 대해 정확히 알아보고 그 위험을 인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수정 기자 sujk@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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