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기이한 역설이 발생했다. 일본 은행들이 달러를 구하지 못해 허덕이는 사이 해외 투자자들의 엔화 조달 금리는 0%에 가까워진 것이다. 헤지펀드 등 외국 투자자들은 이 저금리 엔화를 빌려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를 대폭 늘렸다. 결과적으로 일본 내부는 심각한 자금 경색에 시달렸으나 해외 차익 거래자들은 사실상 공짜나 다름없는 비용으로 자금을 쓸어 담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자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은 긴급 대응에 나섰다. 부실 금융기관을 혈세로 구제한다는 여론과 야당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정부와 자민당은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 공적자금 투입을 강행했다. 이는 국가가 '최후의 보루'로서 개입하는 것 외에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진 위기를 수습할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1997년 12월 17일 하시모토 정부는 총 30조 엔 규모의 공적자금 투입 방침을 공식 발표했다. 이는 과거의 암묵적 보호와 '호송선단식' 금융 관행에서 벗어나 법적 근거에 기반한 구조조정 체제로 전환되는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다.
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한편 은행이 BIS 자기자본비율 규제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회계 기준 완화라는 우회로를 마련했다. 금융당국은 엄격한 BIS 비율 준수를 요구하면서도 보유 주식의 원가 평가 허용, 토지 재평가 차액 및 이월결손금의 자본 인정 등 규제 이행에 탄력성을 부여하여 은행의 자본 확충 부담을 덜어주었다.
정부가 이러한 고육지책을 선택한 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우선 공적자금 투입에 대한 정치적 반발을 의식해 투입 규모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엄격한 회계 기준 적용으로 대규모 손실이 즉각 드러날 경우 예금자 불안이 확산하며 금융 시스템 전반이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또한 시장의 연쇄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시급한 필요성이 정부의 선택을 뒷받침했다. 만약 손실 반영이 강제되었다면 은행들은 BIS 자기자본비율 하락을 막기 위해 보유 주식을 시장에 쏟아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주식 대량 매도 → 주가 급락 → 은행 자산가치 추가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초래했을 것이다. 결국 정부는 이 같은 충격을 피하기 위해 회계적 편의를 봐주는 방식으로 당장의 안정을 우선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주식 거래에서도 기만적인 회계 관행이 나타났다. 은행들은 주식을 매각해 일시적인 평가이익을 실현한 뒤 기업과의 관계 유지를 명분으로 해당 주식을 즉시 재매입했다. 1998년 초 은행권의 주식 보유 규모는 약 24조 엔에 달했는데 재매입 당시 시장 가격이 과거 장부가보다 낮았음에도 이를 다시 장부가로 평가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이는 실질적인 자산 가치 하락을 은폐하고 외형상의 건전성만 유지하려는 회계적 눈속임에 불과했다. 결국 이러한 대응은 부실의 근본적 치유 대신 문제의 해결을 뒤로 미루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듬해인 1998년 2월 일본 국회는 격렬한 논쟁 끝에 공적자금 투입을 위한 두 가지 핵심 법안을 통과시켰다. 먼저 「금융기능안정화긴급조치법」을 통해 금융기관 자본 확충에 활용할 13조 엔의 재원을 마련했다. 동시에 「예금보험법」을 개정해 파산 금융기관 예금자를 보호하기 위한 17조 엔을 예금보험기구에 배정했다. 이를 통해 정부는 총 30조 엔 규모의 전례 없는 위기 대응 재원을 공식적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이 조치의 의미는 단순한 자금 지원을 넘어선다.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할 법적 근거를 명문화함으로써 과거의 불투명한 구제 관행에서 벗어나 법과 제도에 기반한 위기 대응 체계를 구축하는 전환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도적 기틀이 갖춰지자 자본 조달의 길이 막혀 고사 직전에 몰린 은행들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자본금 투입도 본격화되었다. 1980년대 자산 가격 상승기에는 부동산 호황과 증자를 통해 BIS 자기자본비율을 수월하게 유지할 수 있었으나 버블 붕괴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부실채권 상각과 대손충당금 적립으로 자본이 급격히 잠식되자 시장의 신뢰마저 무너진 결과였다.
실제로 1992년부터 1997년 사이에 시장에서 기본자본(Tier 1 capital)을 확충한 은행은 사쿠라, 다이와, 도카이은행뿐이었다. 이들조차 일반 유상증자가 아닌 전환사채(CB) 발행에 의존했는데 이는 대규모 증자가 주가 하락을 부추길 수 있다는 당국의 우려를 의식한 결과였다.
1997년에 접어들며 자본 조달 환경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주요 은행의 신용등급이 연이어 하락하면서 시장을 통한 자본 확충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은행들은 보완자본(Tier 2 capital) 확보를 위해 후순위채 발행에 나섰으나 연쇄 도산에 따른 신용 리스크 급등으로 이마저 소화되지 않았다. 결국 민간을 통한 자본 조달 경로가 완전히 차단되었고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해결책이 되었다.
민간을 통한 자본 조달 경로가 완전히 막히자 정부는 1998년 3월 「금융기능안정화법」을 시행하며 시장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지급 능력은 있으나 자본이 부족한 은행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가 후순위채와 우선주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총 13조 엔 규모의 공적자금을 배정한 것이다.
자본 투입의 심사와 집행은 재무장관, 일본은행 총재,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금융위기관리위원회가 전담했다. 위원회는 지원 대상과 규모를 결정할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았으나 개별 은행을 직접 검사하거나 감독할 권한은 없었다. 이로 인해 은행의 자산 건전성과 경영 실태를 충분히 검증하지 못한 채 대규모 자금을 배분해야 하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출발했다.
이러한 한계는 실무적 결함으로 직결되었다. 금융위기관리위원회는 은행 측 자료에 의존해 자본 투입 여부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실제 부실 규모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과적으로 공적자금은 시스템 붕괴를 막는 임시방편이 되었을 뿐 부실 기관의 퇴출을 늦추고 시장의 도덕적 해이를 심화시켰다는 역사적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처럼 자생적 자본 확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은행들은 초기부터 공적자금을 통한 자본금 투입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우선 '낙인 효과(Stigma Effect)'에 대한 우려가 컸다. 자본 투입 신청 자체가 재무 상태의 악화를 자인하는 신호로 해석되어 주가 급락과 신용도 하락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가 매입하는 우선주나 후순위채가 배당과 청산에서 기존 보통주보다 우선권을 가짐에 따라 주주들의 배당 수익과 권리가 희석될 수 있다는 점도 걸림돌이었다.
은행들의 소극적인 태도가 계속되자 금융위기관리위원회는 주요 은행이 일괄적으로 자본 투입을 신청하는 '집단 참여 방식'을 채택했다. 특정 은행이 부각되어 시장의 의심을 사는 상황을 막고 낙인 효과를 분산시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모든 은행에 동일한 금액을 배분하는 방식은 재무 상태가 가장 우수했던 도쿄-미쓰비시은행에 지나치게 가혹하거나 불합리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기시 아키스케 행장은 충분한 자생력을 갖춘 은행이 공적자금을 통한 강제적 자본 투입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주권을 침해하고 기업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 전국은행협회연합회 회장이기도 했던 그는 재무성의 고강도 압박과 금융계의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상황 속에서 그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별 은행의 원칙보다는 업계 전반의 안정을 우선해야 한다는 판단하에 결국 공동 신청에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정책의 본래 목표였던 구조 개선은 후퇴했다. 우량 은행과 부실 은행의 차이를 희석하는 '평균주의적 배분'이 강화되는 부작용이 드러난 것이다. 실제로 9개 대형 시중은행 중 8개 은행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각각 1,000억 엔씩 자본 투입을 신청했다. 다이이치캉교은행이 990억 엔을 신청한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동일한 금액이 배정된 셈이다. 문제는 이 '1,000억 엔'이라는 기준이 재무 상태가 가장 양호했던 도쿄-미쓰비시은행이 수용할 수 있는 최소 수준에 맞춰 설정되었다는 점이었다.
정부는 낙인 효과를 우려해 모든 은행에 동일한 금액을 배분했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가장 건전한 은행의 기준에 맞춰진 조치였다. 결과적으로 부실이 심각했던 은행들에 1,000억 엔은 자본 잠식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한 생색내기식 지원에 불과했다. 공적자금이 구조적 취약성을 해소하기보다 문제의 심각성을 가리고 시간을 벌어주는 임시방편에 그쳤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1998년 3월 21개 주요 은행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총 1.8조 엔에 머물렀다. 이는 전체 자본 확충 예산인 13조 엔의 14%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개별 은행의 부실 규모를 파악하기 위한 정밀 실사 과정이 생략된 채 획일적 금액을 배정한 '나눠주기식' 조치는 결국 공적자금 투입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구조적 결함은 자본 확충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시 「금융기능안정화법」상 은행은 우선주나 후순위채 중 투입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으나 대다수는 경영권 간섭을 피하고자 채무 성격이 강한 후순위채를 택했다. 실질적인 자본 확충 효과가 큰 보통주나 전환우선주를 통해 재무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려 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결국 은행들은 공적자금을 체질 개선의 동력으로 삼기보다 당장의 유동성 위기만 모면하려는 단기 처방에 안주했고 구조조정의 결정적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셈이다.
1998년 3월 단행된 1차 공적자금 투입은 금융 시스템의 불안을 해소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법적 기반은 마련되었으나 부실의 실체를 직시하기보다 시장 동요를 억제하는 데 치중한 이 조치는 두 가지 결정적인 한계를 보였다.
첫째 은행권의 이해관계와 이를 용인한 정부가 낳은 '평균주의적 배분'이다. 정부는 부실 정도에 따른 차등 지원 대신 대형 은행 간 서열을 유지하려는 업계의 요구를 사실상 수용했다. 은행들은 특정 기관이 부실 은행으로 낙인찍히는 것을 피하고자 지원 규모를 상향 평준화가 아닌 하향 평준화된 최소 수준으로 맞추는 데 합의했다. 특히 회계 규정 완화는 은행 자본이 충분해 보이는 착시를 유도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은행들이 사전에 담합한 최소 금액인 1,000억 엔만을 신청하는 명분이 되었다.
둘째 당국과 은행권의 낙관적 인식과 부실 은폐이다. 정책의 초점은 부실채권 정리라는 근본 과제가 아니라 '3월 결산기 BIS 자기자본비율 방어'라는 단기 목표에 함몰되었다. 회계 완화라는 가림막 뒤에서 은행들은 자본 부족을 숨겼고 정부는 이를 근거로 과감한 공적자금 투입을 주저했다. 당시 부실채권 추정 규모는 약 22조 엔에 달했으나 실제 투입된 자본은 그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1.8조 엔에 불과했다.
본래 공적자금은 시장 신뢰를 회복할 임계점을 넘는 규모로 일괄 투입될 때 비로소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원칙을 외면한 채 미봉책에 의존했고 그 결과 신뢰 회복의 결정적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실패의 징후는 수치로 즉각 나타났다. 1.8조 엔의 공적자금이 투입되었음에도 주요 은행의 평균 자기자본비율은 1997년 9월 말 9.14%에서 1998년 3월 말 9.54%로 겨우 0.4%포인트 상승하는 데 그쳤다. 이러한 미미한 개선 폭은 시장을 진정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정책 효과 덕분에 5월경까지는 잠시 시장이 안정을 찾는 듯 보였다. 하지만 정부가 근본적인 문제를 방치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시장의 불신은 오히려 이전보다 증폭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자본 확충의 규모와 질 모두가 함량 미달이었다는 점이다. 막대한 부실채권 규모에 비해 투입 자금은 시장 기대를 충족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투입액의 약 80%가 손실 흡수 능력이 떨어지는 후순위채나 대출 형태에 치중되어 은행의 기초 체력을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구조였다.
여기에 회계 기준 완화는 은행들의 자본 확충 유인을 억제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장부상 자산 가치를 부풀릴 수 있게 되자 다수의 은행은 경영권 간섭을 감수하며 추가 공적자금을 수용하기보다 BIS 자기자본비율을 형식적으로 방어하는 데 만족했다. 규제 기준을 억지로라도 맞추고 나니 굳이 대규모 공적자금을 수용해야 할 절박함이나 명분이 사라진 셈이다.
결국 1998년의 자본 확충 프로그램은 철저한 자산 실사 없는 관행적 배분으로 인해 실질적 구조 개선에 실패했다. 정부는 부실 은행을 과감히 도려내기보다 과거 '호송선단 방식'의 유산인 관용적 회계 기준을 동원해 우량 은행과 부실 은행을 한데 묶어 보호하는 평균주의적 행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은행들은 이러한 회계적 가림막 뒤에서 자산 평가 기준을 완화하며 부실을 숨기는 데 급급했고 정부의 자본금 투입 역시 위기 모면을 위한 형식적 대응에 머물렀다. 당국의 구태의연한 보호주의와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가 맞물리면서 일본 금융 시스템은 자생적 회복 능력을 상실한 채 장기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김성민 교수(전.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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