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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LG 문중회의 권위와 세 모녀

기사입력 : 2023-09-06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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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LG 문중회의 권위와 세 모녀이미지 확대보기
[한국금융신문 최용성 기자]

최근 ‘리키시’라는 일드를 OTT에서 봤다. 일본 전통 스포츠 ‘스모’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커다란 엉덩이를 드러낸 채 마치 하마처럼 육탄 대결을 벌이는 이 희한한 볼거리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로튼 토마토 지수가 꽤 높던데?”라는 그럴 듯한 핑계 거리를 대고 가족 프로필을 통해 과감하게 시리즈 정주행을 했다.

드라마는 거대 산업화한 일본 프로 스모계 어두운 뒷 얘기를 배경으로 막장 가정에서 자란 문제아 주인공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스모에 입문해 성장해 가는 스토리를 다룬다.

이야기의 큰 틀은 예상 가능한 편이다. 양 다리를 번갈아가며 뒤뚱거리는 몸짓(스모 기본 동작인 ‘시코’라고 한다)을 조롱하던 주인공은 연승 행진을 벌이다 바닥까지 추락한 후 나중에 그 의미를 찾아 한 판 한 판 최선을 다한다는 내용이다.

드라마는 1000년 넘는 세월을 견디며 일본의 대표 프로 스포츠로 자리 잡은 스모의 생명력이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권모술수로 물든 구태적 권위가 아니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이 스모를 지켜왔다.

주인공은 시련을 겪고 난 후 귓등으로 듣던 전통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씨름판(스모 용어로는 ‘도효’)의 권위에 대해 존경심을 표현한다. 오용되지 않고 남용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서 권위의 의미와 중요성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많은 권위는 대부분 구태를 동반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형식주의로 변모하기 십상이다. 어디서부터 구태적인지, 뭐가 형식주의적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가령, LG가(家) 문중회의는 어떠한가. 다른 국내 재벌들과 달리 분리·승계 과정에서 일체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LG가 문중회의의 권위는 어떻게 봐야 할까.

널리 알려진 것처럼 LG그룹 구씨 가문은 불화가 없기로 유명하다. 57년 동업 관계를 유지했던 허씨 가문이 GS그룹으로 분리할 때도, 구씨 형제들이 LS, LX 등 별도 그룹으로 잇달아 분할해 나갈 때도 큰 잡음이 없었다.

배경에는 LG그룹을 창업한 구인회 창업주 가르침이 있다. 그는 “남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신용을 얻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고 한다. 오늘날 LG그룹 문화로 자리 잡은 ‘인화(人和·사람을 아끼고 화합한다)’ 정신이다.

구씨 문중회의는 ‘인화’라는 창업정신을 바탕으로 적자승계 원칙을 지키며 그룹을 안정적으로 성장·발전시켜 왔다. 동업 관계를 정리할 때도, 형제가 분가를 할 때도 이 원칙이 지켜졌다.

관념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총수 일가 26명이 지주회사 (주)LG 지분 41.7%를 나눠 갖고도 그룹 지배권을 단일하게 유지하고 있는 현실은 ‘인화의 구씨 문중회의’ 권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씨 문중회의는 그러나 이러한 가풍을 50여 년 동안 지켜본 종갓집 맏며느리가 제기한 최근 상속 논란으로 그 권위가 위협받고 있다. 고(故) 구본무닫기구본무기사 모아보기 전 회장 부인 김영식 여사와 그의 두 딸인 구연경, 구연수 씨 등이 상속재산을 다시 분배해 달라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80년 역사를 바라보는 LG가 최초의 상속 소송이다.

원고측은 상속재산을 어떻게 나눌 지 협의하긴 했으나 구 전 회장 유언장이 없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며 협의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가족간 사적 대화내용이 담긴 녹음파일이 있다고 했고, 재판 과정에서 LG그룹 전 경영진들이 법정 증인으로 서게 될 것으로 보인다.

김영식 씨 등 세 모녀가 4년이나 지나 상속 소송을 제기한 이유가 뭘까. 소장에 분명한 목적이 나와 있다. 요지는 상속재산을 법정비율대로 다시 나누자는 것이다. 재산을 더 받아내야 한다는 거다. 당시 5개월 동안 협의를 통해 사실상 합의서까지 작성해 놓고 이제 와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법조계에서도 원고 측에 승산이 없다고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오랜 기간 동업과 복잡한 형제 경영을 이어온 LG그룹이 지금도 건재한 것은 물론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인화를 바탕으로 한 문중회의 권위의 힘 덕분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 모든 의사결정 과정이 물 흐르듯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누구는 손해 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누구는 억울해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모녀도 상속재산 협의 과정에서 문중회의 절차와 형식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수 있다.

하지만 LG 문중회의는 단지 한 개인의 재산 상속 정도를 결정하는 권위가 아니라는 점을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세 모녀는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상속분할합의서를 정식으로 작성하고 이제야 뒤엎자고 하는 건 재산을 더 달라는 탐욕으로 보일 수 있다.

기업 승계는 한 개인의 재산 상속에 그치지 않고 그 기업에 몸담고 있는 임직원들과 그 가족, 그 기업과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거래처, 그 기업의 주식을 산 주주 등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매우 고차원적 절차이기 때문이다. LG정도 대기업이면 관련 산업과 국가 경제에까지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방적이고 부당한 권위라면 당연히 고쳐져야 한다. 다만 어떤 문제가 있다고 무조건 법적 소송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법정에서 다뤄지는 권위라면 더 이상 권위를 가질 수 없다.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로 출발해 오늘날 전자, 화학, 통신을 아우르는 국내 대표 대기업집단으로 성장한 LG그룹이다. 그 지난한 세월을 지탱한 문중회의 권위를 이대로 사라지게 만들 셈인가.

더구나 지금은 세계 경제의 전환점에서 국내 기업들 미래생존이 중요한 시기다. 이럴 때일수록 기업을 이끄는 리더에게 가족들부터 힘을 실어줘야 한다.

소송은 필연적으로 감정 싸움으로 이어지고 원래 취지와 상관없이 상대에게 생채기를 내고 굴복시키는 게 목적이 되고 마는 최후의 수단이다. 바람직한 해결책이 무엇인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분쟁은 없는 게 좋고, 경찰서, 법원은 가능한 안가는 게 최상책이다.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 속에서 원칙이 바로 설수 있도록 하는 힘은 불편부당한 권위에서 나온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구씨 문중회의도 남용되지 않고 오용되지 않는 권위로 더욱 단단해지길 바란다. 그게 1000년 기업으로 가는 길이다.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 그리고 2대 상남 구자경 회장, 이어 3대 화담 구본무 회장이 그렸던 길이었을 것이다.

최용성 기자 cys@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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