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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질 줄 알았던 축구선수 요한 크루이프 [마음을 여는 인맥관리 80]

기사입력 : 2026-10-13 07:00

(최종수정 2026-10-13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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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질 줄 알았던 축구선수 요한 크루이프  [마음을 여는 인맥관리 80]이미지 확대보기

요한 크루이프를 키운 감독

70~80년대를 토탈풋볼로 세계를 풍미한 네덜란드 축구 선수 요한 크루이프는 1999년에 20세기 유럽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고 20세기 세계 최고의 선수에는 펠레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0살 때 아약스 유소년팀에 입단한 크루이프는 판 데르 페인 감독으로부터 축구만이 아니라 규범과 가치를 배웠다. 그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실수를 바탕으로 창의적으로 연습할 수 있다고 했다. 판 데르 페인 감독은 슈팅, 헤딩, 드리블, 패스, 볼 컨트롤 이 다섯가지 기본기를 핵심으로 하는 구체적인 훈련 방식을 고집했고 이는 크루이프에게 가장 쉬운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크루이프는 한번에 공을 터치하는 능력을 최고급 기술로 본다, 그렇게 하려면 수십만번의 볼 터치 훈련과 일만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판 데르 페인의 단순하지만 확실한 훈련법이 크루이프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고 크루이프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 선수들의 인성교육에 힘을 쏟게 된 계기가 되었다.

리누스 미헬스가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열여덞살의 크루이프는 팀의 막내였지만 미헬스 김독에게는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보였다.

미헬스 감독은 유일하게 크루이프만 불러서 경기의 전술을 이야기하고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지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는지를, 어떤 플레이를 원하는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이야기했다.

미헬스 감독은 클럽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크루이프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미헬스는 감독이 되자마자 토탈풋볼로 불리는 전술을 연습시켰고 전술의 중심에는 크루이프가 있었다. 훗날 사람들은 미헬스 감독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크루이프라고 이야기하지만 크루이프는 선수로서 발전하는 과정에서 늘 적시에 적절한 조언과 가르침을 준 것은 미헬스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지도자로서 요한 크루이프

크루이프는 클럽의 이사들과 많은 충돌이 있었다. 크루이프는 이사회에서 축구장의 일을 결정하지 말고 축구장에 있는 사람들이 이사들이 해야 할 일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루이프에게 이사들은 언제나 선수 다음이었다.

크루이프의 천재성은 선수 은퇴 후에 더 빛났다. 이미지 확대보기
크루이프의 천재성은 선수 은퇴 후에 더 빛났다.

이런 생각은 크루이프가 좋은 감독을 만나 경기의 운영에 참여하면서 느끼게 된 결과였고 1999년에 운동선수와 비즈니스 관계자를 위한 교육기관인 크루이프 인스티튜티 설립으로 이어졌다. 크루이프는 아약스클럽이 유러피안컵에 출전하면서 많은 돈을 받게 되었지만 그 돈을 선수들에게 분배한다는 규정이 없다는 걸 알고 구단이 받는 돈의 70%를 선수들에게 주자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구단 측에서 이 문제를 논의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크루이프는 성과를 근거로 하는 정직한 처사라고 강력히 밀어붙여 결국 선수에게 배분이 되었다. 크루이프는 선수가 병원에라도 가면 반드시 같이 가 의사가 다리에 칼을 대지는 않는지 확인하고 선수가 수술을 받는 날이면 꼭 찾아가 감독이 왔으니 다 괜찮을 거라고 안심시켰다. 크루이프는 항상 선수들과 모든 것을 함께했다.

크루이프는 선수들의 호흡을 극대화하기 위해 오페라가수를 초빙하기도 했고 몸의 모든 에너지가 발을 통해서 빠져나가므로 발마사지사를 기용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전문가를 활용했다.

코치진에는 선수들이 120분동안 뛸 수 있고 120분 뛴 후에도 웃을 수 있는 체력을 기르도록 요구했다. 토탈풋볼을 구사하기 위해서 경기 중 모든 선수는 서로 10m 이내의 거리를 유지하며 좌우 상하로 5개의 일정한 라인을 지키게 했다.

크루이프는 어릴 때부터 숫자에도 밝았고 야구에도 관심이 있던 다양한 경험을 활용하여 토털풋볼의 핵심은 골키퍼가 첫 번째 공격수이고 공격수가 첫번째 수비수라는 개념을 주입시키고 발이 아니라 공으로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사회에 기여

바르셀르나 클럽의 부흥에 큰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뒤통수를 맞고 미국으로 건너간 크루이프는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유럽에서는 각자가 스스로를 위해 싸우지만 축구계의 발전을 위해 힘을 모으자는 제안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프렌차이즈 시스템은 달랐다. 미국에서는 모두가 힘을 합해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기본 전제 조건이다. 미국 관중은 늘 최고의 경기만을 기대하기 때문에 모든 클럽은 항상 승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승리해야 하는 것이다.

크루이프가 본 미국은 진정한 스포츠 강국이었다. 유럽에서는 클럽시스템이 근간이므로 선수들은 먼저 클럽에 스카우트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학교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모든 학생이 학교에 다니므로 모든 학생에게 기회가 있다. 유럽에서는 학교와 스포츠가 철저히 구분되어 있으나 미국에서는 학업과 스포츠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축구는 머리로 한다. 다리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크루이프에게 ‘크루이프 재단’을 세우는데 미국의 시스템은 좋은 동기 부여가 되었다.

팀의 구단주가 민주당원이었기에 크루이프는 케네디가문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한번은 존 케네디의 동생으로 장애인 운동선수를 위한 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로부터 스페셜 올림픽 홍보대사를 제안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크루이프는 장애아동을 위한 축구수업을 이끌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동들이 지시한 대로 움직이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공을 차자 크루이프는 이 일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고 그만 두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니 관계자들이 축구수업을 촬영한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공을 어디로 찼는지 보지말고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 얼굴을 보라고 했다. 크루이프는 아이들이 발로 공을 차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함을 느끼는지를 보면서 같이 행복함을 느꼈다. 축구실력이 느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아이들이 공을 차면서 신체 조정력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크루이프는 1997년 크루이프 재단을 설립하여 장애인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더 많은 어린이에게 축구를 할 기회를 주기 위해 도심에 축구장을 만드는 크루이프 코트 사업도 시작했다.

크루이프는 언젠가 100년 후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책임질 줄 알았던 스포츠맨으로 기억되고 싶다”. “우리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서로 협력해야만 한다. 바로 그것이 내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다”라고 답변했다. 훌륭한 감독을 만나 선수로서의 실력 향상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품성을 키우게 된 결과였다.

출처 및 인용: 『요한 크루이프』 (지식공작소 발간)

윤형돈 네트워킹센터장/인맥관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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