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성적은 평균 아래였고, 변변찮은 외국어 실력에, 해외경험도 군대경험도 없고 딱히 내세울 만한 기술도 없었다. 합격의 실마리는 하나도 없었지만 성실하게 시험에 응한 게 면접관의 눈에 들어 간신히 통과를 하게 되었다.
롤러는 스파이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유럽에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외국 관료와 인맥을 형성하고 대사관 담당자와 친분을 쌓아 기꺼이 내부 사정을 얘기해 줄 정보원을 발굴하는 것이었다.
롤러가 외국에서 보낸 몇 달은 하루하루가 처절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건진 게 없었다. 한번은 소련 영사관 안내실 직원에게 접근하였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KGB 소속으로 도리어 롤러를 포섭하려고 작전 중이었다.
롤러는 그녀에게 석유투자자라고 소개하고 다음 날 야스민을 점심에 초대하여 이것 저것을 캐물으면서 그녀가 최근 권력을 잡은 종교지도자를 싫어하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파리나 뉴욕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아서 이런 여행을 오는데도 한참동안이나 돈을 모아야 했다고 했다. 승산이 있음을 판단한 롤러는 야스민에게 현재의 외무부 일을 계속하면서 컨설팅을 할 수 있음을 제안하고 계약금까지 두둑히 챙겨주겠다고 하자 야스민도 흔쾌히 수락을 했다.
롤러는 이제 한건했다는 마음으로 상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더니 상사는 ‘반드시 CIA라는 정체를 밝혀야 한다. 그쪽 정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야스민은 죽거나 감옥에 갇힐 수 있으므로 이 일의 위험성을 알고 시작하도록 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했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하라
롤러는 CIA에서 일하기 전에 아버지가 경영하는 철물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영업에는 소질이 없어서 저조한 실적만 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건설회사를 방문하였을 때 마침 사장은 오랜 전화 통화 중이었고 책상 옆에서 그녀의 다섯살짜리 아들이 블록으로 놀고 있길래 당시 20대 초반이던 롤러는 같이 놀아주기 시작했다. 전화를 끊은 사장이 롤러의 상품 설명을 듣고 난 후 갑자기 본인의 어려움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삶은 훌륭한 여성사업가와 좋은 어머니사이에서 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삶이기에 항상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롤러는 여자사장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상태였지만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해서 자기는 아버지 밑에서 일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형은 아버지에게서 인정을 받고 있는데 자기는 영업을 못해서 너무 힘들다는 것을 토로했다.
결국 롤러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삶의 어려움을 털어놓았지만 의외로 여사장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미팅이 끝날 때쯤 에 사장은 당장 필요한 제품은 없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그날도 허탕을 쳤다.
그런데 두달 뒤 그 여사장이 전화로 아주 큰 주문을 넣었다. 롤러는 깜짝 놀라서 ‘제가 사장님이 원하는 가격으로 납품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제가 좀 형편없는 세일즈맨이잖아요’했더니 여사장은 ‘괜찮아요, 우리 사이에’.
누군가의 속내를 들었을 때 나의 속마음을 함께 보인다면 상대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
이 일을 계기로 롤러는 영업에 임하는 자세가 180도 달라졌다. 그는 고객과 상담할 때 상대의 기분, 관심, 열정을 주의 깊게 듣고 그에 공감하려고 노력했다. ‘누군가의 속내를 들었을 때 제 속마음을 함께 보인다면 상대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는 고객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대신에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 했다.롤러는 야스민과 마지막 저녁을 먹다가 과거의 교훈이 문득 생각이 났다. 지금까지 그는 정보원을 포섭하는 일이 영업을 하는 일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수준까지는 그것은 동일한 활동이었다. 양쪽 모두 타인과 정서적으로 연결이 되어야 하고, 그 말은 상대가 말하려는 것을 듣고 있음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태껏 야스민과는 그러지 못했다. 야스민은 자신의 고민을 보여줬지만 그는 자신을 야스민과 나누지 않았다. 롤러는 CIA에서 겪었던 다양한 실패 사실을 야스민에게 설명을 하며 자기도 이제 그만 둬야 할 입장이지만 곧 고국으로 마지못해 돌아가야 할 야스민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하며 앞날을 걱정해주었다. 야스민의 기운을 북돋우는 대신에 그녀가 그에게 그랬듯이 자신의 좌절과 실망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야스민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저도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싶어요. 저한 테도 중요한 문제니까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롤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틀 뒤 야스민은 CIA 안가에서 거짓말탐지기 테스트를 통과하고 비밀통신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20년 동안 CIA와 정기적으로 소통을 하면서 각종 사건의 내막과 정부 발표의 배경을 알려주었다. 그녀의 협력이 한번도 발각된 적은 없었다. 마침내 롤러는 CIA에서 가장 성공적인 해외정보원 포섭 전문가가 되어 2005년 은퇴할 때까지 수십 명의 해외관료를 설득해 민감한 대화에 끌어들였다.
정보원 포섭에 관한 한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공작관은 포섭 과정에서 상대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평가 단계에서는 ‘동료’에서 ‘친구’가 되고, 정식 포섭단계에 들어가면 ‘사운딩보드’라는 ‘비밀을 털어 놓은 친구’의 역할로 옮겨간다. 그렇게 되면 요원은 공작원과의 접선을 목숨을 걸고 신뢰할 수 있는 동료와의 소중한 만남의 기회로 기대하게 된다.
인용 및 출처: 대화의 힘 (찰스 두히그 저)
윤형돈 인맥관리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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