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돈 주고 왜 사 먹어?”라는 말처럼 그때 그 시절은 김치를 돈 주고 사 먹는 것이 이상한 시절이었다. 11월 김장철에 김치를 담가 1년을 나고, 주위에 나눠주기도 하던 때였다. 그런 시절에 포장김치라니. 게다가 미국인들 식탁에 김치를 올리겠다고?
김치가 면역 강화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가 속속 발표되면서부터다. 임정배(62) 대상 대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평사원에서 출발해 CEO까지
‘대상맨’ 임정배 대표는 외유내강형 경영인이다. 그는 임원, 팀장뿐 아니라 신입사원에게도 존칭을 쓴다. 창업주인 고(故) 임대홍 회장의 ‘인간 존엄과 자존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이후 대상그룹 유럽법인장, 대상㈜ 기획관리본부장, 대상홀딩스㈜ 대표이사, 대상㈜ 소재BU 전략기획본부장, 식품BU재경본부장 등을 겸직하다 2017년 3월 대상㈜ 각자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품질 최우선주의’를 내세웠다. 식품기업으로서 소비자 중심 경영을 적극 펼치겠다는 의지였다.
그 결과, 한때 6000원대까지 떨어졌던 회사 주가를 4만원대로 끌어올렸다.
임 대표는 평사원에서 사장까지 대상에서만 30년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그의 성공 신화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임 대표는 1990년대 유럽에서 근무하면서 현지인과의 명확한 소통을 위해 꼼꼼히 메모했다고 한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상대에 대한 분석과 대상그룹 장점을 기록한 것이 훗날 자양분이 됐다.
임 대표는 “CEO가 된 후에도 이 습관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정확한 분석이 상대를 향한 설득으로 이어진 셈이다.
세계인 입맛 잡은 포장김치
임 대표는 2020년 초 정홍언 전 사장에 이어 단독 대표이사직에 올랐다. 그가 대상그룹 운전대를 잡게 되면서 사업 확장에 속도가 붙었다. 종가 김치의 글로벌 사세 확장이 본격화한 것이다. 종가는 글로벌 생산거점을 구축해 신규 시장을 개척하는 등 내수기업이 아닌 수출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3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대규모 김치공장을 준공했다.
임 대표가 대상그룹 수장으로 오르던 당시 공교롭게도 전 세계에 감염병이 창궐했다. 코로나 팬데믹 3년간 세계 경제가 역성장을 그렸다. 그런데 김치만은 달랐다. 김치가 면역력 강화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면서다. 우리나라 김치 수출액은 2021년 최고치를 달성했다.
국내에서는 ‘코로나19에 대한 김치의 항바이러스성 효능’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고, 프랑스 몽펠리에대학 연구팀은 “발효된 배추를 주로 먹는 국가들 사망자 수가 적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코로나 기간 김치 수출액은 고공행진을 펼쳤다. 2019년 1억500만달러였던 김치 수출액은 2020년 1억4400만달러, 2021년 1억6000만달러로 정점을 찍었다. 그러다 작년에 김치 수출액은 7년 만에 1억4100만달러를 기록하며 역성장했다.
이런 가운데 대상 종가만은 흔들림 없는 성장세를 보였다. 2019년 4300만달러였던 수출액은 2020년 5900만달러, 2021년 6700만달러, 2022년 7100만달러로 꾸준히 증가했다. 올 상반기 우리나라 김치 수출액은 8000만달러를 기록했는데, 종가 수출액이 그중 절반이 넘는 4100만달러나 됐다.
종가 김치가 이처럼 세계인의 김치가 되기까지는 임 대표 뚝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임 대표가 김치 해외사업을 적극 투자하면서 매출을 끌어올렸다. 글로벌 생산거점으로 현지 공장을 증설했고, 김치도 철저히 현지 입맛에 맞춤형으로 생산했다.
세계 곳곳에 김치 터 닦다
종가 김치는 현재 미국과 유럽, 대만과 홍콩 등 전 세계 50여개 국가에 진출했다. 일본 수출 물량 90%, 홍콩과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권 수출 물량 80%가 종가에서 나온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김치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아프리카나 남미 등도 신흥 시장으로 떠올랐다. 종가는 일본에서의 성공을 발판 삼아 이들 국가에도 철저히 현지화한 김치를 만들 계획이다. 대상 관계자는 “종가는 김치연구소를 통해 김치 유산균 연구와 다양한 제품들을 개발해 왔다”며 “포장, 유통보관에서 기술 혁신을 통해 맵지 않고 달콤한 맛이 나는 일본 현지화한 김치를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종가가 현재 주력하는 시장은 미국이다. 2019년부터 미국에서 김치 수요가 폭발하자 서부와 중부 등 유통 채널로 김치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초에는 국내 식품업계 최초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LA)에 1만㎡(3000평) 규모 김치공장을 준공, 미국 현지 식문화에 맞는 김치를 생산하고 있다. 비건 김치, 백김치, 비트김치, 피클무, 맛김치, 양배추김치 등 10여 종이 있다.
또 종가는 LA공장 가동으로 김치 영업이나 생산, 유통, 판매관리를 효율적으로 개선하며 소비자들 요구는 물론 원재료 수급에도 유연하게 대처했다.
미국 현지에서 신선한 채소를 공수해올 수 있어 맛도 보장된다. 종가는 LA공장에서 생산되는 김치 주요 원료인 배추와 무, 파 등을 현지에서 조달한다. 종가는 수년간 현지 시장조사를 거쳤으며, 연구개발을 통해 김치의 맛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양질의 원료를 선정했다.
종가는 추가 생산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미국 현지 식품업체인 ‘럭키푸즈’도 인수했다. 럭키푸즈는 2000년 설립된 아시아 식품 전문회사다. ‘서울’ 김치와 스프링롤, 소스 등 다양한 제품군을 생산하고 있다. 대상은 럭키푸즈가 확보한 유통채널에도 종가 김치를 입점했다.
유럽의 경우 폴란드 현지 기업과 합작법인을 설립해 대규모 김치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이 공장은 6613㎡(2000평) 규모로, 내년 하반기 준공을 목표로 한다. 2030년까지 연 3000톤 이상 김치를 생산한다.
우리나라 배추김치를 비롯해 유럽인들이 선호하는 양배추, 케일, 당근을 활용해 매운 맛이 없는 현지화한 김치 3종을 선보인다. 또 폴란드 신선식품 업체 ChPN(Charsznickie Pola Natury)과 협력해 유럽 대형마트인 ‘리들’ ‘까르푸’ ‘오샹’ 등을 공략한다.
종가는 국내 업계 최초로 북미와 유럽에서 국제 식품안전 신뢰도를 보증하는 ‘코셔(Kosher)’ 인증마크를 획득했다.
이를 토대로 유대인, 무슬림, 채식주의자 등을 고려한 김치도 만든다. 2500억달러 규모 코셔 시장을 선점하는 전략인 것이다.
한국의 김치에서 세계의 김치로
종가 김치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정부가 우리나라의 대표 전통 음식인 김치를 알리기 위해 상품화하면서 탄생했다. 인간문화재 38호이자 조선 궁중음식 전수자인 고 황혜성씨를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김치 장인들이 모였다. 이들은 유산균 및 종균 개발과 김치 포장 연구를 통해 마침내 ‘종가집’이라는 브랜드를 선보였다. 종가집은 ‘대대로 전해 내려온 손맛을 표준화한다’는 의미다.
종가는 품질이 우수한 100% 국내산 재료로 김치를 담근다. 종가 김치의 연간 배추 사용량은 약 7만톤에 이른다. 배추 특성상 생육 시기별 품질이 다르고, 계절적 영향도 많이 받아 고품질 배추를 사전 구매해왔다. 고추나 마늘, 양파 등 양념소는 산지 직송으로 공급받는다.
종가 김치는 이물선별, 엑스레이 등 공정별 위생제어시스템으로 체계적 품질, 위생관리를 받는다. 이에 2001년 ISO9001인증, 2004년 HACCP인증, 2008년 LOHAS인증 등 국내 최고 식품안전인증도 따놓았다.
특히 종가는 변하지 않는 맛을 구현하기 위해 포장 기술로도 특허를 받았다. 김치는 발효와 숙성을 거치면서 탄산가스가 발생하는데, 진공 포장 시 김치가 부풀어 오르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종가는 1989년 탄산가스를 붙잡아두는 ‘가스흡수제’를 김치 포장 안에 넣는 기술을 개발했다. 김치 고유의 맛과 품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도 포장형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1993년에는 캔김치도 개발해 통조림처럼 가볍게 김치를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대상은 종가 김치가 세계인의 입맛을 홀리기 시작하자 지난해 10월 기존 ‘종가집’을 ‘종가’로 변경했다. 기존 국내에서 ‘종가집’을, 해외에서 ‘종가(JONGGA)’로 쓰던 브랜드명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한국의 김치에서 모두의 김치’를 목표로, 글로벌 마케팅도 전개한다.
임 대표는 지난 3월 열린 정기주주총회에서 “모든 미국 가정에서 만나는 아시안 그로서리 기업이 되겠다”면서 “고추장 등 한식을 중심으로 냉동, 냉장, 상온 등 전 카테고리에서 핵심사업을 구축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손원태 기자 tellme@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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