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것들 중에는 전위예술(前衛藝術)이나 행위(行爲)예술 등을 포함할 수 있다. 특히 행위예술의 경우에는 소장할 수도, 팔수도 없는 분야이면서 돈을 내고 보는 것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여기에 열정을 쏟는 이들이 있다.
퍼포먼스는 행위예술이고 무용이나 가수의 행위는 공연예술이다. 공연예술(公演藝術, performing art)에는 굿, 마당놀이, 연극, 오페라, 뮤지컬, 연주회, 리사이틀, 콘서트, 희곡, 발레, 춤, 서커스, 마술 등이 있다. 행위예술(performance)은 연극이나 무용 마임 같은 공연예술의 의미와 상통할 수 있지만 예술의 특정 장르로도 구분 가능한 예술작품의 일종이다. 미술 작품으로서의 퍼포먼스는 각본의 중요성이 요구되는 이벤트와 즉흥적 연출 변화가 필요한 헤프닝으로 구분될 수 있다.
행위예술은 행위자와 행위극이 서로 분리된다. 시각예술로 말하면 몸과 못짓이 물감과 붓의 작용으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다. 행위예술의 특성이라 한다면 첫 번째, 축적된 기억이나 사건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만들고 제작하여 전개하는 창의적 관계성이 중요하다.
세번째로는 행위예술의 전개상에서 스토리의 연결성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행위 자체에 대한 창의성과 창의과정에서의 행위자의 관계성에서 행위 자체의 특질을 파악하여야 한다.
행위예술 안에 해프닝이라는 요건이 있는데 해프닝(happening)이란 말은 ‘지금 우연히 생긴 일’이란 의미로서 즉흥성과 현장성, 언어보다는 시각과 청각을 주재료로 삼는 행위예술에서 출발한다. 박물관과 미술관에는 완성된 미술품으로 전시되지만 해프닝은 돈으로 교환되는 것을 거부하는 일종의 자유 정신적 활동이다. 때문에 공연자체도 전시장이나 바깥, 일상적 공간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행위들은 감상자가 돈을 내고 예술을 감상할 수는 있어도 미술투자의 관점에는 돈으로 소장 할 수 없습니다.
공연예술이나 행위예술이나 둘 다 예술가의 신체를 활용한 행위의 표현이다. 차이를 둔다면 행위예술은 예술가 스스로가 표현하고자 하는 행위를 직접 행하는 반면 공연예술은 스스로 혹은 누군가의 대본이나 기획 연출 등의 상황에 자신의 행위를 맞춰야 한다.
해프닝의 한 예로 미국의 작곡가이면서 플럭서스의 일원이었던 존 케이지(John Cage)는 1954년에 황당한 연주회를 진행한 바 있다. ‘4분 33초’란 제목의 연주회는 4분 33초 동안 아무런 공연도 없이 청중들의 소음을 채집하는 행사로 끝을 맺는다. 지휘봉을 들고 관객과 함께 연주회를 진행한 해프닝이었다.
공연예술 중에는 연극이 있다. 연극은 리허설을 통해 연출자의 여건에 연기자들이 협업한다. 연극의 연출자는 직접 행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순간적 변화에 대처하기 어렵다. 연기자들의 연출자가 만들어 놓은 규칙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개인의 개성보다는 전체의 줄기에서 더 나은 규칙에 대한 변화를 책임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자는 전체의 구조 안에서 스스로의 변화를 가질 수 있지만 연출자가 요구하는 의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좀 어렵게 말하면 공연예술에서 연극은 짜여진 틀 안에서 연출자의 결과를 따라가야 하지만 행위예술은 결과에 대한 예측을 관객이나 사회에서 규정하게 된다. 연극에서의 행위자(공연배우)는 연출자가 제공한 배역에 따라 행위의 주체가 된다.
팬터마임(pantomime)이나 1인극을 포함한 여타의 공연의 경우(오페라, 연극 등)에는 행위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보다는 기획자 혹은 전체 내용의 일부로서 개인적 사상이나 철학적 성향은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행위예술은 공연예술과 달리 행위하는 사람과(performer) 행위를 위한 몸짓(performance)이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만 상황의 변화는 언제든지 두가지의 관점이 함께 움직여진다는 특성을 지닌다. 행위예술은 행위자와 행위가 분리되어 보이지만 함께 변화하는 특성을 지닌다. 공연예술은 출연자와 행위자가 일체의 관점에서 움직이지만 결과에 대한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다.
행위(行爲)란 특정의 결과를 기대하면서 행하는 의지적 몸짓이지만 행위예술에서의 행위는 특정의 결과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다양성의 결과를 수용한다. 행위예술은 시각예술이나 공연예술이 수용할 수 없는 지각과 공간, 일시적 시각과 시간에 따른 변화를 동시에 제공 가능한 예술의 수용체가 된다.
박정수 미술칼럼니스트/정수아트센터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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